폭력/비폭력, 운동권/시민의 이분법을 넘어

과감하게 2008.07.02 17:45 조회 수 : 664

폭력/비폭력, 운동권/시민의 이분법을 넘어
[기고] 사제단의 구국 미사에 대한 기사를 보고

문성욱 textepolitique@hotmail.com / 2008년07월01일 5시36분




오늘 집회에 참여하지도 않은 주제에, 지금껏 남들보다 열성적으로 참여해온 것도 아닌 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어설픈 글을 시작한다.


그 '필요'를 느끼게 한 것은 월요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시국 미사에 대한 기사들이었다.


사제단은 정부의 행태를 통렬히 비판하면서, 시위대에게도 비폭력의 원칙을 지켜달라고 당부하고, "국민 속으로" 향하기 위해 청와대가 아닌 남대문으로 행진로를 잡았다고 한다. 어쩌면 그런 방침이, 당장 더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있고, 어쩌면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도 적절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걸로 충분한가 하는 의심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 의심의 정체는 미사에 참여한 어떤 시민의 말을 보고 분명해졌다. "사제단의 결정에 감동했다. 촛불 집회가 변질됐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사실 못 느끼겠다. 소위 조중동에서 그런 말을 많이 만들지만 실제로 경찰의 폭력 진압에 맞서 폭력적으로 대응하는 시민은 매우 소수다. 그리고 오늘 미사와 행진이 언론에 보도되면, 누구도 촛불 집회를 비난할 수 없을 게다".("남쪽으로 향한 촛불, 청와대를 버렸다", 《프레시안》)


촛불 집회가 이어지면서, 정치권과 언론이 던진 비난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건 촛불 집회의 순수성이 퇴색되었다는 것이다. 그 순수성이란 필경, 집회의 문제의식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라는 처음의 현안을 넘어 정권 퇴진이라거나 공기업 민영화, 대운하 등의 사안으로까지 확대되었으며, 거기에는 '일반 시민'이 아닌 '운동권'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다는 식의 논리에서 제기되는 것이리라.


이 논리와 짝을 이루는 것은 폭력/비폭력의 이분법이다. 그런데 이 이분법은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 사이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6월 10일, 단지 '명박산성' 앞에 스티로폼으로 연단을 쌓아 올리자는 상징적 행위를 두고도 적잖은 사람들이 "비폭력"을 외치며 반대했던 것은 '비폭력'이 얼마나 경직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비폭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전경이든 시위대든 아무도 다치지 않고 아무도 불쾌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이상한 평화주의 ― 이 말을 여기에 쓸 수 있다면 ― 로만 여겨졌다.


물론 현 시점에서 비폭력이라는 원칙 자체를 부정할 까닭은 없다. 어쨌거나 아무도 다치지 않고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은 일임은 당연하다. 그러나 일단 묻고 싶은 것은 과연 그 비폭력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점이다. "촛불의 힘은 비폭력에서 나온다"는 식의 말은 집회 초기부터 많이 되풀이되어 왔으나, 비폭력이 대체 무엇인지, 그것이 왜 옳은지, 비폭력의 경계는 어디까지인지에 대해 성찰하는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들어본 기억이 없다.


그것은 차라리, 노동자나 운동권 등을 두고 언론이나 정치권의 보수주의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폭력 집회"라는 용어를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거의 모든 경우에 (때로는 시위대가 끝까지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경우에도) '선제공격'을 감행했던 경찰의 폭력을 은폐하는 기만에 불과하며, 그들이 왜 그렇게 거리에 나설 수밖에 없었는지는 애당초 관심도 없는 야바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담론이 긴 세월 동안 끈질기게 유포되면서 '폭력성'은 그들과 '일반 시민'을 나누는 뚜렷한 경계선이 되었다. 폭력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모든 투쟁의 악덕을 증명했다. 동시에 그 폭력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투쟁은 왜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는 폭력의 딱지 아래서 매장되기 일쑤였다.


지금 집회 참가자들이 외치는 "비폭력"은 저 보수주의적 담론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집회 현장에서조차 운동권이 아닌 순수한 일반 시민이라는 자기의 정체성을 끝끝내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몸부림을 계속하는 한, 우리는 보수주의자들의 말장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일부 참가자들의 돌출적 행동을 비폭력의 이름으로 비난할 때 자주 등장하는 "조중동에게 빌미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논리는 현재의 비폭력이 원칙의 문제라기보다 보수주의적 담론과의 기이한 타협(?)의 결과임을 분명히 드러내며, 비폭력의 "힘"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바로 그 타협의 산물이다. (그 힘이, 타협이 순진한 착각에 지나지 않음은 보수언론이 한번도 촛불집회에 대한 비난을 멈추지 않았던 데서 알 수 있다.)


폭력/비폭력이라는 이분법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는 실제 상황을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10일의 '스티로폼 연단'에 대해 양분된 반응을 보였던 것과 달리, 지금의 시위대는 나란히 서서 모래를 나르며 '국민토성'을 쌓고, 밧줄로 버스를 끌어당기는 등, 얼마 전까지 폭력이라고 비판받았던 행동을 하면서도 그것이 폭력적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이처럼 사람들이 행동이 바뀐 것은 사람들이 폭력적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경찰의 탄압과 이명박 정부의 변치 않는 독단과 같은 상황적 요인들 때문이며, 애초에 폭력/비폭력이 딱 부러지게 나눌 수 없는, 경계가 모호한 개념들이기 때문이다. 연행되기 일보직전인 옆의 사람을 구하기 위해 그 경찰을 밀치는 것은 폭력인가 아닌가? 살수차를 망가뜨리려고 시도하는 것은 폭력인가 아닌가? 이 질문들은 언제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판단해야만 하는 질문들인 것이다. 더군다나 자기 스스로 지극히 폭력적이고 무차별적인 탄압을 서슴지 않는 경찰의 작태는 폭력/비폭력의 이분법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우스꽝스러운 것인지 스스로 증명해 보이고 있다.


이 중언부언 늘어진 이야기가, 사제단의 시국 미사에 대한 기사를 읽고 내가 느낀 불편함을 설명해준다. "비폭력 원칙"을 강조하는 건 종교인으로서 당연한 일일지 모르겠으나, 현 상황에서 그것은 오히려, 지금까지의 촛불 집회가 만들어 온, 폭력의 문제에 대한 실천적인 성찰의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효과를 갖는게 아닐까? 그 뒤에 남는 건 위에 인용한 시민의 말처럼, "경찰의 폭력 진압에 맞서 폭력적으로 대응하는 시민은 매우 소수"라는 식의 담론뿐이다.


그 담론은, 결코 성찰된 적 없고 정체도 불분명한 비폭력의 원칙을 기준으로 하여, 그 원칙에 해당되지 않는 시민들의 의견을 억압하고, 시민과 '시민이 아닌 자들'을 분리하는 기능을 할 수 있다. 그 점은 22일 새벽의, 방화를 시도한 한 집회 참가자를 시민들이 경찰에 인도한 사건에서도 얼핏 드러났던 바이며(<전경버스 방화시도 30대, 경찰에 넘겨야만 했나>, 《참세상》), 폭력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사안에 대해 다수 참가자들과 입장이 다른 이들을 무조건 '프락치'라고 매도하는 경우는 집회 현장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폭력/비폭력의 이분법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운동권'과 '일반 시민'을 분리하려는 담론을 강화함으로써, 여러 사회단체와 노조의 운신을 제약하는 것이기도 하다. 운동권은 결코 '시민'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운동권과 시민의 이분법이 유지되는 한, 즉 '순수성'에 대한 강박을 놓지 못하는 한, 우리는 대운하ㆍ공기업 민영화 같은 '변질된' 사안들은 물론이고, 쇠고기 문제 자체도 해결하지 못할지 모른다. 그 문제는 결코 독립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집회 초기, 시위에 참가한 중학생들을 향해 저녁 8시에 경찰이 "여중ㆍ여고생 여러분, 시간이 늦어 밤길이 위험합니다. 여중생ㆍ여고생을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라고 방송한 데 대해 학생들이 "우리 원래 야자 12시에 마쳐요"라고 응수했던 일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라는 문제가 학생들을 "12시"까지 괴롭히는 경쟁의 논리와 같은 맥락에서 벌어지는 일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례이다.


그 논리는 지금껏 운동권이 문제삼았던, '이윤'의 이름으로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이주노동자의 절규를 무시하며 장애인ㆍ여성 등 수많은 '소수자'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논리들과도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문제는 그저 폭력을 용인할 것인가 하는 점에 있지 않고, 이 글의 목적도 '화염병을 던지자'는 주장과는 거리가 멀다. 문제는 폭력/비폭력의 이분법, 운동권/시민의 이분법이, 집회 참가자들 사이에 소모적인 대립 구도를 만들고, 더 나아가 촛불집회 자체의 역동성을 경직시킨다는 점에 있다.


1999년 시애틀의 반세계화 투쟁을 다룬 <이것이 민주주의!>라는 다큐멘터리에서, 어떤 활동가는 당시 투쟁에 실로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한 점에 대해, "다양성이 우리의 힘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다양성은, 그것이 개인과 집단 사이의 차이들을 인식하고, 그 차이들을 성찰과 토론의 대상으로 삼을 때만 힘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을 때 다양성은 어떤 무비판적이고 획일적인 기준에 따라 '남'을 '우리'로부터 배제하는 독단론만을 낳게 될지도 모른다. 사제단의, 더할 나위 없이 용감하고 존경스러운 선택을 보면서도, 씁쓸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까닭이다.


또한, 기본적으로 '종교단체'인 사제단과 대조되게도, 정작 노조나 여타 단체와 같이 정치적ㆍ사회적인 조직들이 무력한 모습을 보이는 것에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수많은 조직들이 모인 광우병 대책위는 정부의 탄압에 맞서 방송차를 꾸리며 험난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지만, 과연 집회 현장에서 새로운 담론을 생산하거나 논의를 주도하는 역할을 했는가는, 내가 모르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미심쩍은 느낌이 든다.


민주노총 역시 총파업 출정식을 가지고 쇠고기 출하 저지 투쟁을 계속하고 있지만 그것이 폭넓은 호응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하는 모습이다. 대책위나 민주노총이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 향후 계획이 정확히 어떠한지도 모르는 입장에서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지나친 일임에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그들의 싸움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떤 '지도'나 '조직화'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수십 년 동안, 누구보다도 앞장 서 싸웠던 그들의 경험과 그간의 숙고가, 촛불집회에 어떤 동력을 제공해줄 수는 없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KTX 파업 현장에서의 연설에서 김진숙 씨가 한 말처럼, "오늘 촛불이 범람하는 광장이 있기까진 서서 노래 부를 한 뼘의 공간을 위해 보도블록이 짱돌이 되어야 했던 시절이 있었고, 광주에서 죽어간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며 밤을 새워가며 마셨던 절망의 증거들이 낮이면 꽃병으로 환생하는 용기가 있어야 "했으며, "지금 소화기나 물대포를 폭력이라 부르기 까진 최루탄을 눈처럼 덮어쓴 채 창자까지 쏟아질 듯하던 구역질과 그 최루탄에 맞아죽은 이한열과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죽어간 박종철과 쇠파이프에 맞아죽은 강경대와 군홧발에 밟혀죽은 김귀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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