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노동윤리를 가지고 노동해방, 자기해방을 할 수 있을까

백무산 시인이 들려준 사색_두번째  
  
지난 10월22일 민주노총울산본부가 주관한 ‘1987년 노동자대투쟁 계승사업’의 일환으로 백무산 시인을 초청해 들었던 이야기를 울산노동뉴스가 두번째 풀어 놓습니다. 백 시인은 자본주의 노동습관으로 어떻게 해서 심리적으로 자신을 지배하는 자의 품에 들어가게 되는지, 노동자는 하나다가 아닌, 왜 다름의 차이를 인정해야 하는지 현대철학으로 이야기를 풀어놓았습니다.


▲백무산 시인과의 토론에 집중하고 있다.



노동의 강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노동이라고 하면 흔히 노동하는 행위 또는 노동자의 삶을 얘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노동은 중세 이후 강압적으로 조직화됐습니다. 우리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는 종교개혁의 결과로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해 나간 여러 기독교 종파를 두루 일컫는 말)라고 하는 중세 개혁시기 그 이전 노동과 이후 노동은 굉장히 달라요. 우리가 알고 있는 칼뱅과 루터 같은 종교개혁가 사회개혁가들이 사회개혁을 해나가는 과정에 중세시기 노동윤리와 개혁이 있었던 계기는 바로 중세의 봉건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시기였거든요.

이 시기에 대량생산의 요구가 있었고 대공장들이 많이 생겨나게 됐을 때 과거의 노동관습으로는 공장노동자로 쓸 수 없다고 했었습니다. 상상이 잘 안 될 수 있지만 과거에 그 사람들이 시간규율과 노동규율에 따라 일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중세시대 사회개혁가들은 노동을 광범위하고 강압적으로 조직하기 시작합니다. 토지를 수탈하고 거리로 나온 부랑아들을 감금하고 강제노동시키고 노동자로 만드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실제 우리는 그런 경험을 못한 것 같지만 자본주의 출발점이라 볼 수 있는 일제하 시기에 때맞춰 일어난 것이 일제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있었습니다. 그걸 만들어 가지고 조선 땅에 있는 토지조사를 시작해요. 글 모르는 사람이 90%가 넘는데 토지신고를 하라고 하니까 신고를 할 수가 없잖아요. 신고 안 한 땅은 전부 다 국유화 명목으로 일제 총독부 소관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총독부에서 어느날 와서 땅을 비켜달라고 하니까 농민들 전부 다 쫓겨 나와야 했습니다. 그 의도가 땅을 뺏는 순간과 함께 노동자로 만들어야 됐던 것이지요.



유럽의 산업혁명 시기에는 굉장히 조직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가 자본론을 쓸 때 기록에 따르면 영국 노동자들의 평균수명이 15세였다고 합니다. 그 당시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는 영국 노동자들의 조건을 미국에 있는 흑인 노예보다 못하다고까지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노동을 왜 신성하다고 하고, 어떻게 해서 노동은 인간적 본성이라고 하기도 하며 노동자가 역사, 문명의 주체라고 얘기하는지. 이것이 알고보면 전 다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노동은 신성하지 않다. 노동자는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존재다. 노동은 인간적 본성이 아니다. 인간의 시간과 개성을 팔아서 겨우 밥을 먹는 존재라는 거. 여러분 이런 얘기 들으면 기분 나빠 할 수도 있지만 가장 기분 나빠 할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노동자들이 아니구요, 노동자들은 알아요. 나는 별로 노동이 신성하다고 느껴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가장 기분 나빠 할 사람은 자본가예요. 왜냐하면 노동이 전혀 신성하지 않은데 신성하다고 이데올로기화 한 사람이 자본가들입니다.

실제로 노동은, 예를 들면 중세 이전에 처벌, 고문, 출산의 고통이라든지 이런 걸로 취급받았거든요.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동을 해선 안된다 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노예사회에서 할 수 있는 얘기긴 하지만 중세를 거치면서 종교개혁가와 사회개혁가들에 의해서 강압적인 훈육과 감시와 처벌을 통해서 노동자를 만들어 내고 이념화 시킨 것이 바로 노동의 윤리입니다.

이 윤리를 우리는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윤리는 부르주아 사회에서 가르치지 않죠. 근데 문제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왜, 노동자들의 생산력이 역사발전의 주체라고 생각하는 이상 노동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됐든 무관하다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사실은 노동은 실종돼 있습니다.

노동의 본질적인 문제를 극복하지 않고 사회개혁이 일어나도 소용이 없습니다. 노동의 심리를 가장 잘 얘기한 사람은 독일의 심리학자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1897∼1957)라고 있습니다. 독일의 공산당 당원이었는데요, 우리가 알고 있는 히틀러가 마치 전두환이나 박정희처럼 총칼을 들고 와서 민중을 지배한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요. 히틀러는 정상적으로 선거를 통해 집권한 세력이었어요. 당시에 강력한 노동계급의 지지를 받은 공산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히틀러가 집권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공산당에 등을 돌리고 히틀러를 지지했어요. 사실은 히틀러를 만든 건 노동자계급이예요.

노동자계급이 가지고 있는 성격을 가장 잘 분석해서 내놓은 사람이 빌헬름 라이히예요. 주도적이고 창의적인 노동을 할 수 없는 산업사회의 노동 습관이 결국은 파시즘적 권력을 만든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200년, 300년 사회주의 운동이 있었던 일부 선진국 노동자들을 제외하고 지구상의 거의 모든 노동자들은 강력한 보수정당의 지지자들입니다.

87년에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났죠? 그 해 12월에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를 찍어준 사람은 사실은 노동자계급이 다수입니다. 마찬가지로 2007년 이명박을 찍은 사람이 노동자들이라고 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자본주의 노동의 습관에서 나온다는 것이죠.
이들을 개조하고 사회적인 전제를 자각하게 하고 그리고 자신을 해방하기 위해 투쟁하게 만들어낸다는 민주노총의 자기 방침들을 가지고 있겠지요.

이것이 왜 안 먹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하는데 바로 아주 긴밀해지고 강고한 자본주의 노동습관 때문이라고 봅니다.
굉장히 타율적이고 차라리 지시를 받는 게 더 편해요. 자기 스스로 자본가 편이 되기 위한 모든 조건이 노동습관에 들어와 있는 거예요.



노동습관이 어떻게 해서 심리적으로 자신을 지배하는 자의 품에 들어가게 되는가.


이 얘기는 나중에 얘기할 기회가 더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쨌거나 지금 우리가 볼 때는 번연한 걸 가지고 많은 노동운동가들이 곤란해 하는 문제, 왜 노동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배반하는가.

이 이해를 풀지 못하는 숙제가 알고 보면 노동의 습관에 있다는 것입니다. 노동의 습관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것이죠. 노동의 습관을 유지하고 노동의 습관이 다시 소비의 습관으로 이어지고 자신의 삶에 수동적 또는 타인 의존적으로 진행되는 이런 노동습관은 필연적으로 자기를 지배하는 집단의 품에 안기게 된다는 것이죠. 이런 분석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촛불집회를 하는 과정에서 어느 논객이 이명박이는 손에 피도 안 묻히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걸 다 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얘기를 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건 틀린 말이다, 이명박이가 죽인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우리가 많이 겪었어요.

저 현대중공업 74년에 입사를 했는데요, 입사 오리엔테이션 하는 자리에서 한 친구가 인사부장에게 “여기 사람 많이 죽는다면서요?” 물으니까 인사부장이 하는 소리가 “죽는 사람보다 산 사람이 많은데요” 그러더라구요. 이틀에 세명 죽는다고 공공연하게 얘기들을 했었습니다. 그 당시 미쓰비시 조선소에 배 한척 만드는데 50명 죽는다고 했는데 현대중공업은 세네 배 죽는다고도 했습니다.

기록에 남아 있는 게 하나도 없긴 하지만 일하다 다친 피투성이 된 동료를 차에다 싣고 변변한 병원도 하나 없었어요. 울산 중구 옥교동 뒤에 고려병원 거기로 가면 가운 입은 의사가 차 문 열어 보고 그냥 문 닫고 숨 붙어 있는 걸 그냥 보내버립니다. 그런 일들이 숱하게 많았죠. 가장 친한 친구도 그렇게 죽었구요.

그러한 숫자들이 정말 만만치 않았습니다. 초기에 배를 만드는 과정보다 조선소 건설과정이었기 때문에 이명박이 직접 관리를 하면서 있었던 일들이었구요. 경부고속도로 2년5개월 만드는 동안에 77명 죽었다고 추풍령에 비를 세워놨어요. 보면은 울화통이 다 터지죠. 왜, 그 당시에 몇 명 죽었냐고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저들이 77명 죽었다고 위령비를 세워 놨어요. 우리는 잘 알고 있죠. 77명이 아니라 770명은 죽었을 거예요. 수없는 사람을 시간과 공정을 줄여 비용을 깎기 위해서 사람 목숨을 밀어 넣었죠. 그 당시에 죽은 사람들 정말로 개 값도 못받았죠.




우리는 하나가 되기를 원하죠.

왜냐하면 힘이 있어야 되니까. 뭉쳐야 되니까 하나가 되기를 원하고, 1%도 안되는 자본의 힘에 대응하기 위해서 뭉쳐야 된다고를 알고 있어요.
그런데 지난번 금속노동자라는 신문에서 산별을 막 결성할 때 산별을 축하하는 시를 써달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보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산더미처럼 많은 자갈을 모은다고 해서 하나가 되겠느냐. 혹은 많은 물방울이 모여 연못을 만들겠느냐. 사실은 그게 아니라 각각의 다른 팔과 다리와 눈과 귀와 코를 모아서 하나의 생명체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냐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죽어 있는 자갈 더미와 죽어 있는 물호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자 했던 것인데요, 이것이 개개인의 문제와 집단문제를 어떻게 볼것인가 철학적인 문제와 연관이 돼 있습니다.

개개인의 발전이 곧 사회발전이고 개개인의 인간적 성장이 사회의 성장이다는 명제를 많이 걸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동조합은 더더구나 그렇구요. 자기 자신이 자본과 대결하자면 어쩔 수 없이 차이를 묵살하고 이걸 한 개로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과거에 먹혀들어 갔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사회주의의 집단노동들이 성공을 했죠. 흩어져 있는 노동을 하나로 조직했기 때문인데 북한같은 경우만 해도 73년 정도에는 조직되지 않은 자유스러운 무질서를 폭넓게 조직함으로써 훨씬 경제가 앞섰다고 해요. 근데 그것이 끝이예요. 집단을 만들면 개인은 수동화되고 타율적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개개인들이 자신의 창의력을 발휘해서 각각의 다른 것들이 모여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렇게 봅니다. 같은 것이 모여서는 안되고 다른 것이 모여야 된다. 예를들면 남과 북은 하나다라고 하는데 난 반대합니다. 남과 북은 다르다라고 말해야 된다고 봅니다.

저는 또 생태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도법스님 탁발순례하는데 와서 얘기해달라고해서도 자연과 인간이 하나다 라고 보지않고 자연과 인간은 다르다. 왜, 다르다는 인식을 갖고 있지 않고 같다는 인식을 갖게 되고 나의 시각으로 자연을 규정하게 되는거죠.

우린 다르다 라고 보면 타자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됩니다. 다르다는 것을 긍정하고 바라봐야 되고 부부는 같다라고 보는것도 역시 전 반댑니다. 부부싸움은 주로 같기 때문에 문제가 되거든요. 다르기 때문에 가치가 평등하다는 거죠.

같은 것끼리는 서열이 생기는 거죠. 학교에 계시는 선생님들은 잘 아실 것 같아요. 얘들을 같다라고 보면 서열이 생기고 다르다라고 보면 서열이 없는 거죠.

연변 노동자들 접촉을 많이 해봤는데 굉장히 신기해요. 한동안 이해를 못해서 고민이 많았는데 굉장히 이기적이예요. 중소기업하는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연변 노동자들 안 쓰고 태국, 필리핀 동남아시아 사람들을 쓴데요. 왜냐면 젊어서 집체주의 집단노동을 해온 사람들이 개인주의 성향이 훨씬 강해요. 개인주의 사람보다.

이 문제를 분명하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들 집단은 지극히 기계적인 집단이었어요. 아침에 들어와서 개별로 노동을 분담하고 일하고 자기 결정력을 갖지 못하고. 수동적인 집체는 오히려 개인주의를 만드는 거죠. 한국에서 일을 하더라도 그 습관을 못 버린다고 하더라구요. 이렇게 강제된 집체주의 속에서 개인이 훨씬 더 개인주의예요. 개개별로 흩어져 있는 사람도 자신에게 자율적 권리가 있는 사람은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있는데.

그런 면에서 노동조합을 집체화시키는 건 굉장히 불안한 상태입니다. 왜,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이예요. 사회주의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과 꼭 같습니다. 이런 강제된 집체는 한꺼번에 무너져 버려요. 그 속에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차이끼리 맞물린 조직화가 아니고 마치 둥근 공이 산더미처럼 모여 있는 것이예요. 이건 한꺼번에 흩어져 버려요. 차이를 긍정하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가운데 뭉쳐져 있는 것은 강한 결속 고리가 있다는 것이죠.

자본주의 사회 속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회주의 사람들보다 더 배려하는 마음이 있을까, 한동안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강조를 왜 했냐면 소위 ‘타자의 철학’이라고 해서 현대철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해체철학이 많이 나오는데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는 철학입니다. 왜, 뭉치니까 권력이 되고 뭉치니까 폭력이 되는 것이예요. 이걸 흩어놔야 된다고 보는 것이든요. 일종의 지방자치제를 도입한 당시에도 이런 논리를 일정 수용한 것입니다. 지자제로 권력을 흩어놔야 되는 것이예요. 흩어놔야 중앙집중 독재권력이 형성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거든요.

전 뭉치면 죽는다는 입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소수의 집단의 다양한 네트워크를 형성한 조직체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 개개인의 개성과 독창성 그리고 차이, 차이의 철학, 이 차이를 어떤 방식으로 네트워크를 만들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차이의 네트워크화 해야 하는 것이지 차이를 없애버리고 같은 것끼리는 네트워크화를 하면 안되요. 소통할 게 없거든요. 발전도 없고.




차이를 인정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남성지배의 가부장적 체제 중심에서 시작이 됐습니다. 그 다음에 여성주의, 환경생태주의, 소수자, 각각 우리 자신이 소수자고 약자죠. 소수자에 대한 배려는 어느 것을 중심으로 놓고 어느 것을 부차화시킬것이 아니라 각각의 차이의 평등을 이뤄야 된다는 게 평화를 선호하는 사람들의 사고 중심이예요. 이게 작은 집단이지만 평등하다고 할 때 가치의 평등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가치의 평등은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거죠. 학교 학생 30명을 서열을 매기면 반드시 1등이 생기고 반드시 30명이 생기는 것은 결국은 꼴지를 생산하는 것이다, 1등을 만드는것이 아니라. 그러나 얘들의 각각의 개성과 전문성을 살려 냈을 때 그들의 차이를 인정하게 되면 모두가 서열을 매길 필요가 없어요. 서열화 되는 것은 차이를 없앴기 때문에 서열화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여러 현상도 마찬가지입니다.

편집국 / 2008-10-31 오후 3:12:19  울산노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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