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포퓰리즘과 상호 파괴적 분열을 넘어서자
진보신당 창당과 4.9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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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미국발 금융위기에 직면한 이명박 정권의 무능무대책과 원자재가-물가폭등 속에서 치러지는 이번 4.9총선은 50% 내외로 예상되는 사상 최저의 투표율과 한나라당의 ‘배부른 분열’,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민주노동당의 ‘배고픈 분열’로 특징지어진다. 혹자는 ‘공멸 뒤의 진보의 재구성’을 말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속편한 가십성 낙관에 불과하다. 지난 대선의 연속선상에서 역전된 보수적 정치지형과 민중운동진영의 정치적 사기저하가 구조화되는 나쁜 방향의 전망이 우세한 것이 객관적 현실이다. 그런 면에서 민주노동당의 위기 원인 진단과 비대위 혁신실패, 진보신당의 창당과 이후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분석은 이미 지난 일에 대한 사후논평이 아니라 이러한 어두운 현실을 헤쳐 나가고 바로잡는 반성과 성찰의 출발점이 되어야한다. 이러한 평가논의가 얼마나 내실 있고 대중적으로 진행되어 어떤 대안적 합의를 창출할 수 있느냐에 따라 ‘총선 이후 진보의 재구성’이라고 명명된 재편과정의 성사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잘못된 분당과정과 종북주의 논란의 오류
무엇이 민주노동당의 분당을 초래했는가. 오늘의 사태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한 일차적 책임이 민주노동당의 당권파(자주파)에게 있음은 분명하다. 자유주의 정치세력들과의 차별화는커녕 동반몰락을 자초했고, 무수한 패권주의적이고 파행적인 당 운영을 계속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이들 당권파는 자신들의 잘못된 정치노선에 대한 반성과 파행적인 당 운영에 대한 반성을 회피하고 무마하는 데만 급급하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초점을 맞추어 재확인 평가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자주파를 비판하고 나선 신당파가 주도한 분당과정의 문제점이다. 신당파는 대선 패배 평가와 자주파의 패권주의 비판을 이른바 ‘종북주의’ 논란과 성급한 분당으로 몰고 감으로써 당 혁신이라는 자신의 명분조차 스스로 갉아 먹은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특히 신당파가 제기한 종북주의라는 쟁점은 그 자체의 뜻도 모호하거니와, 민주노동당의 모든 문제를 NL자주파의 대북 관련 정치노선의 책임으로 돌리는 데 급급한 주장이라는 면에서 납득하기 어렵고, 토론하기도 매우 곤란한 주장이다. 자주파의 조직적인 책임은 그동안 자행되어온 다수파의 패권주의적 파행적 조직운영에 대한 비판을 통해 촉구되어야 할 사안이었다. 물론 자주파의 퇴행적인 민족주의적 정치사상 노선에 대한 이념적 정치적 비판이 그러한 조직적 행태와 무관할 수 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대중적 토론과 비판을 통해 접근되고 달성되어할 과제이지, 모든 복잡다단한 정치적 논란과 토론의 과정을 종북주의라는 낙인을 찍어서 배제해버리는(혹은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바람몰이 정치로 대응해서는 곤란하다. 이는 당의 지도부와 정치노선에 대한 당원 대중의 다종다양한 의문과 불만을 때로는 지도부 일반에 대한 대중의 무차별한 반정치적 반감에 편승하고, 때로는 반공주의적이고 반북주의적인 대중 정서에 편승함을 통해, 지극히 파퓰리즘적인 방식으로 동원하고 소비해버리는 무책임한 처사였다.
결국 신당파의 이러한 공세는 자주파의 방어적 대응만을 강화시킴으로써 더 이상의 토론과 합의가 불가능한 상태를 초래할 뿐이었고, 분당이 종료된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토론이 아닌 서로에 대한 낙인찍기와 책임전가만이 횡횡하고 있다(‘미제의 간첩’이라든가, ‘종북주의자’라든가). 더욱이 이들 간의 대립과 분당 과정은 자기 정파 주도의 총선대응에 과도하게 몰입한 나머지 서로가 서로를 우경화 경쟁으로 내몰고, 서로가 책임질 수 없는 대중운동의 자기 파괴적 분열을 부채질하고 있다.
반성 없는 배타적 지지 고수방침과 충분한 대중적 토론을 거치지 못한 성급한 진보신당 창당과정의 문제점
진보신당은 지난 3월16일 창당대회를 열고, 당 공동대표단과 4.9총선 비례대표, 지역구 후보들을 인준하며 공식 출범했다. 출범과 동시에 신당은 평등-생태-평화-연대라는 가치를 새로운 진보정당의 중심 가치로 내세우고, 민주노동당의 성과와 한계를 계승하고 혁신하겠다는 비전을 밝혔다. 특히 안에서 말라 죽느니, 차라리 얼어 죽는 길을 택했다는 진보신당 활동가들의 선도 탈당과 분당의 변들은 사뭇 비장했다. 그러나 번개 불에 콩 구워 먹는 듯한 창당 과정의 모습은 탈당의 비장함이 과연 무엇을 위한 비장한 결단이었는지 의문스럽게 한다. 진보신당의 창당 과정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 운동에 대한 근본적 평가와 대안 형성에 대한 대중적 토론과 합의보다는 총선일정과 그에 대한 언론정치 이미지 형성을 중심에 놓고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다른 무엇보다도 분당 및 창당 과정의 성급함은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 철회와 관련된 논의상황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진보신당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소위 중앙파 노조활동가들의 다수가 활동 중인 금속노조와 공공연맹에서조차 ‘배타적 지지’ 관련 논의는 논의 유보되거나 공식 논의 안으로 상정되지도 못한 것이다. 실제로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대다수는 여전히 민주노동당 분당과 진보신당에 관해 제대로 납득하고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이자 현실적인 힘의 근원은 민주노총이라는 노동자대중조직의 조직적 지지와 지원이다. 하지만 진보신당은 이른바 “민주노총 당”을 벗어난다는 거꾸로 된 취지 아래, 민주노총 내부 토론과 대중적 합의를 생략하거나 또는 무시한 정치 행보를 성급하게 밀어붙인 것이다.
물론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 못지 않은 내부 혁신 과제들을 쌓아놓고 있는 형편인데다가, 우경적이고 코퍼러티즘적인 편향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오늘날 민주노동당의 분당사태와 전반적 우경화 역시 ‘민주노총으로부터의 전염’이라고까지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이 많다. 그런 면에서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관계는 혁신되어야 하는 관계다. 정당과 노조의 결합이 서로의 운동역량을 높이고 급진화하는 방향이 아니라, 서로를 갉아먹는 관계를 구성하고 있는 악순환의 고리를 타파하는 것이 관건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혁신과 아래로부터의 합의를 전제로 하지 않는 ‘배타적 지지’는 내용 없는 형식적인 협약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배타적 지지 철회와 당-노총 관계 재정립의 방향이 당-노총의 혁신이 아니라 소위 “‘민주노총당’ 탈피”이어서는 곤란하다. 물론 민주노총당 탈피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말하는 사람들마다 전혀 다를 수 있다. 배타적 지지 철회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근본적 반성 없이 자기정파의 패권적 지배력을 지키는 데 급급한 민주노총 지도부의 모습은 분명 ‘통일단결’을 외치는 자신들의 외침과 정반대로, 누구보다도 분열주의적이고 패권적인 행태이다.(특히 평생당원 이벤트나 진보신당을 표적으로 한 무리한 지역공천 등등) 그러나 조합원의 정치적 주체화와 관련된 대책과 노력 없이, ‘조합원의 정치적 자유’만을 외치는 것 역시, 자칫 형식적인 배타적 지지를 유지하는 것만도 못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나아가 종종 이른바 “비정규직 대변당”을 명분으로 내세우는 ‘민주노총당 탈피’가 자칫 노동자 대중운동 기반의 정당 조직구조 포기를 중심 내용으로 하는 한, 그것은 실제로는 ‘비정규직노동자의 정당’이 아니라 ‘탈 노동자정당화’, ‘탈 운동정당화’로 흐를 수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무엇을 적색화하고, 어떻게 재구성하겠다는 것인가
물론 다른 한편으로 신당은 스스로 신당의 성격에 대해 '총선 공동대응기구'이자 총선이후 본격 창당을 위한 ‘과도 정당’이라는 단서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목전에 닥친 총선에 우선 대응하되, 총선 이후 폭넓은 당내외 세력과 함께 평등-생태-평화-연대를 가치로 하는 새로운 진보정당을 확대 건설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적색으로, 보다 녹색으로’를 표방하는 진보신당이 아직까지 무엇을 민주노동당보다 적색화한 것인지, 진보의 재구성을 어떻게 이루고자 하는지는 불분명하다. 총선을 한 달여 앞두고 창당한 신당의 여건상 아직 많은 것이 준비되기 어려운 조건임을 감안하더라도, 지금까지 나타난 몇몇 모습들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우선 “서민세상을 열어가는 진보신당”이라는 명칭은 숱한 논란을 거쳐 채택된 ‘노동당’에 비해 볼 때 명백한 퇴보다. 남북관계 관련 정책보다는 소위 ‘민생정치’라는 경제정책 공약의 비중을 높이는 것을 적색이라고 여기는 이해하기 어려운 풍토마저 눈에 띤다. 전략공천 비례대표 명부 또한 선거를 앞둔 신당의 의도를 십분 감안해도 매우 우려스럽다. 한나라당의 꼿꼿장수(김장수 전국방장관)에 맞대응한다는 황당한 취지로 내세운 피우진 중령 공천은 도무지 무슨 함량미달의 언론정치인지 알 길이 없다. 지난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열린 우리당을 지지했던 인사들을 비례대표로 대거 내세운 민주노동당과 비교하여, 과연 어느 당의 행보가 더 우경적인지 경쟁하는 듯하다. 나아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이른바 '전략공천 부문할당 비례대표제'는 그 제도 자체가 과연 현 시기 진보정당의 합당한 후보 선출 방식인가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아야한다.
우선 부문할당 비례대표제는 거의 전적으로 미디어 정치로 이용되고 있는 형편이다. 당의 이념적, 정책적 지향과 정치적 지도력보다는 언론 노출 효과를 염두에 둔 명망성과 구색 맞추기, 여론 명분용 제도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정당 활동의 대표성과 책임성, 일관성을 해치며 나아가 당의 기반을 당원 대중운동으로부터 의원단 활동으로 변경하는 부정적 효과를 가진다.
둘째, 현재 남한 진보정당의 현실적 역량과 성장 정도를 감안할 때, 당을 대표하는 비례대표의 앞자리 순번을 부문할당 대표로만 채우는 것은 진보정당의 낮은 발전 정도를 적절히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실제 당을 대표하고 책임지는 정치활동을 좀 더 우선시해야 한다.
셋째, 부문할당제는 다양한 사회운동들, 특히 소수자운동에 대한 특별한 배려를 기본정신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자칫 이러한 노선은 사회운동들의 실질적 연합과 통합적 발전보다는 포스트주의적인(무정부적이고 해체주의적인) 무지개연합을 지향할 위험을 내포한다. 또한 그와는 다른 맥락에서 이해당사자 운동의 과제들과 상층 명망가들의 구색 맞추기에 그칠게 될 위험도 지닌다.
예컨대, 창조한국당은 이번 총선에서 필리핀 이주노동자 출신 후보를 비례대표 1번으로 전략공천 했고, 진보신당은 여성장애 활동가를 전략공천 했다. 진보신당과 창조한국당이 이주노동자 운동과 여성, 장애 운동을 대체하거나 대표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흐름은 사회운동의 정치적 역량과 기능을 외주화하고 정당에 위탁하게 되는 위험도 가질 수 있다.
민주노동당 분당 과정에서 적(정치적 경쟁자들)을 악마화하는 부정적 선동이 난무했다. 하지만 (당원)대중들의 반정치정서를 무차별적으로 동원하는 ‘진보 포퓰리즘’적인 정치 행태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공허하다. 민주노동당과 다르다는 주장 말고, 실제 이념과 운동을 어떻게 재건하겠다는 내용이 부재하다. 지금과 같은 양상이라면 총선 이후로 미루어진 ‘본격 창당’과 ‘진보의 재구성’이 어떤 기준과 내용으로 이루어질지 우려스럽다. 신당은 이미 총선에 모든 역량을 투여하고 있고, 총선의 성과를 바탕으로 '본격 창당'할 계획이다. 하지만 당의 이름조차 알리기 어려운 상황이니 이념과 정책보다는 노회찬, 심상정 전의원의 명망에 의지하고 있다. 명망성에 대한 의존은 신당을 노심당에 불과하게끔 하는 부정적인 측면과 함께 신당의 통합력을 유지해주는 역할을 한다. 진보신당의 전망은 노심의 지역구선거 당락 여부와 일정수준 이상의 정당득표율이 동시에 만족되지 않을 경우 매우 위태로울 수 있다. 예컨대, 노심이 지역구에서 선전하고 정당 지지율이 미비할 경우, 신당은 노심의 지도력 아래에서 통합력을 유지하겠지만 군소정당화 될 것이다. 반대로 노심의 지역구 성적이 기대 이하일 때는 굉장히 높은 정당 지지율을 얻지 못한다면 총선을 이끈 노심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지면서 재분열될 위험이 있다. 성급한 총선 전 창당과 총선 몰입이 낳은 딜레마이다.
문제는 정치위기다! 정치적 환멸에 빠진 노동자대중을 다시금 정치의 주체로!
최근 들어 자유주의자들조차 종종 거론하는 정치위기는 기존 정치제도의 위기를 뜻한다. 입법ㆍ행정ㆍ사법부의 권력분립을 통한 견제와 균형, 다원적인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정당과 이익집단의 매개가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질서다.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정치위기의 해소는 정당정치의 복원이고, 특히 중도 좌우파 양당체제의 황금기로의 귀환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치의 본질에는 계급적대가 존재하며, 따라서 오늘의 정치위기는 기존 지배질서가 더 이상 계급적대를 포섭하고 관리할 수 없는 심각한 무능력을 의미한다고 본다. 하지만 이는 역으로 민중운동에게는 계급운동을 형성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이념, 노선, 조직, 전략의 위기를 뜻한다(기존의 노조와 정당과 같이 제도화된 형태들의 위기). 따라서 대중의 정치적 환멸이란 곧 개인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집단적 운동 일반에 대한 거부나 무관심을 포함한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이 처한 곤란의 본질은 대중운동 쇠퇴의 정치적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본질적인 원인이다. 보다 구체적인 해법을 찾기 위한 위기 분석은 보다 구체적이고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고, 그 책임의 소재 역시 치열한 논란의 대상일 것이며, 그것을 밝히기 위한 작업은 곧 새로운 대안적 사회운동의 형성을 위한 도정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자주파와 진보신당파는 이러한 분석과 노력을 포기한 채 서로간의 책임 떠넘기기의 수렁에 빠지게 된 것이다.
당내 자주파와 평등파, 양자에 대해 좌익적인 관점에서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그룹들의 상당수는 자주파와 평등파가 공동으로 민주노동당의 의회주의적 변질을 자초했고, 창당의 기본 토대인 노동자대중운동과 분리된 것이 가장 커다란 위기의 원인이자 혁신의 지점이라는 데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로인해 혁신에 실패한 민주노동당과 성급한 진보신당을 넘어서는 이른바 “진정한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다시 시도되어야 한다는 일반론이 제기되곤 한다.
그러나 무엇이 “진정한 정치세력화”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매우 불투명하다. 또한 “진정한 정치세력화”가 곧 제3의 진보정당 건설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 당은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과는 또 무엇이 다른가에 답해야 할 것이다. 이에 의회주의, 개량주의가 아닌 변혁적인 진보정당, 혹은 비제도적인 투쟁정당, 혹은 사회주의노동자당이 진정한 정치세력화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다른 대안들이 모색되고 있다.
그러나 진보정당의 건설을 대중의 정치적 주체화의 전략적 목표로 대체해버린 ‘정치세력화’ 노선은 반신자유주의 사회운동의 정치적 급진화와 강화보다는 분열에 기여한 것은 아닌지 진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때이다. 민주노동당의 다수파와 신당파, 제3의 변혁적 정당파를 포함한 노동자운동 내 진보정치세력 일반이 처한 오늘의 현실의 곤란은 “진정한 정치세력화” 혹은 의회주의, 개량주의 세력과의 대결, 혹은 그들과의 분리정립이기 이전에 이른바 ‘정치위기’라 부를 수 있는 계급투쟁의 주객관적 조건의 근본적 곤란이다. 그의 핵심에는 대안전망의 상실 속에서 정치적 환멸에 빠진 대중이 있다.
다시 말해 민주노동당의 득표율 저하된 이유는 결국 투쟁을 통해 무언가를 얻지 못하고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한 대중의 실망과 좌절로부터 기원한 것이다. 경제위기하의 구조화된 패배주의, 대중의 정치 불신(반정치정서)의 심화라는 조건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직면한 민주노동당내 정치 그룹들은 위기에 빠진 사회운동을 정치적으로 강화하고 지원하기 보다는 탈 사회운동적인 길을 선택했고, (원외 노동자대중운동에 당의 중심을 두기보다는) 원내 활동이나 언론 이미지 메이킹에 집중했다. 그 결과 객관적인 어려움에 빠진 대중과 당의 분리는 확대 심화되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집권 자유주의 정치세력과의 동반몰락을 피할 수 없었던 민주노동당에게 남은 것은 선거결과에 대한 자주파와 중앙파간의 책임 공방이고, 자주파 지도부의 책임 회피에 대해 소수파인 중앙파의 일부는 종북주의를 지렛대로 하는 (선도탈당과) 분당의 길을 선택했다.
이 과정에서 의회주의/개량주의는 위기를 초래한 본질적 원인이 아니라, 위기를 왜곡 심화시킨 잘못된 선택이다. 즉 대중과 현장은 건강하고 변혁을 갈망하는데, 개량적이고 잘못된 지도부가 이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대중의 외면과 이탈이 발생한 것이 아니다. 만약 그 같은 상황이라면 사태는 개량적인 지도부를 교체하거나, 건강한(변혁적인) 대중을 대표할 수 있는 별도의 조직을 분리 건설하는 것을 통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현실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대중은 “민주노동당도 똑같은 정치인들이다”, “내 삶의 어려움이 민주노총의 투쟁, 민주노동당의 진보정치를 통해 해결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는 반정치적 반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공동의 집단적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가운데, 대안적 전망을 향한 토론과 연대를 포기한 대중들은 현실의 어려움들이 커져가는 과정에서 특정한 정치적 노선에 대한 비판과 경쟁이 아니라 모든 정치적 행위와 연대 자체를 기피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 자체, 즉 계급 형성과 계급 투쟁의 곤란이다. 따라서 사회운동의 복구와 재형성이 과제가 된다. 신당파의 자주파 비판이 잘못된 것은 자주파가 잘한 일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대중은 민주노동당(혹은 민주노총)의 혁신보다는 그것에 대한 거부와 이탈이라는 반정치적 정서를 분출했는데 이러한 폭발을 진보적이고 대안적인 방향으로 이끌기보다는 그것을 부추기고, 편승하고, 악화한 것이 신당파의 착각이고 오류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종 노심당이라고 불리는 진보신당은 총선 결과에 따라 또 다른 이탈과 분열을 재연할 우려가 크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긴급하고도 근본적인 과제는 현존하는 노동자운동 조직들과 대립되는 별도의 당을 새롭게 건설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과 정체성으로 분열되어있는 노동자운동 조직들 안에서 단호하고 급진적으로 활동하는 대안 좌파적인 분파들의 형성과 연합을 지향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지역과 현장에 기반한 변혁적 사회운동의 재형성에 주력해야한다. 나아가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사회주의 당파들을 포함하는 진보정당과 사회운동의 활동적이고 급진적인 대안 좌파적 분파들은 총선 이후 사회운동의 분열/분할이 강화되고 고착화되는 양상을 극복하고, 이념과 운동을 재건하기 위한 공동 논의와 모색에 나서야한다.
진보신당 창당과 4.9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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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발 금융위기에 직면한 이명박 정권의 무능무대책과 원자재가-물가폭등 속에서 치러지는 이번 4.9총선은 50% 내외로 예상되는 사상 최저의 투표율과 한나라당의 ‘배부른 분열’,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민주노동당의 ‘배고픈 분열’로 특징지어진다. 혹자는 ‘공멸 뒤의 진보의 재구성’을 말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속편한 가십성 낙관에 불과하다. 지난 대선의 연속선상에서 역전된 보수적 정치지형과 민중운동진영의 정치적 사기저하가 구조화되는 나쁜 방향의 전망이 우세한 것이 객관적 현실이다. 그런 면에서 민주노동당의 위기 원인 진단과 비대위 혁신실패, 진보신당의 창당과 이후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분석은 이미 지난 일에 대한 사후논평이 아니라 이러한 어두운 현실을 헤쳐 나가고 바로잡는 반성과 성찰의 출발점이 되어야한다. 이러한 평가논의가 얼마나 내실 있고 대중적으로 진행되어 어떤 대안적 합의를 창출할 수 있느냐에 따라 ‘총선 이후 진보의 재구성’이라고 명명된 재편과정의 성사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잘못된 분당과정과 종북주의 논란의 오류
무엇이 민주노동당의 분당을 초래했는가. 오늘의 사태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한 일차적 책임이 민주노동당의 당권파(자주파)에게 있음은 분명하다. 자유주의 정치세력들과의 차별화는커녕 동반몰락을 자초했고, 무수한 패권주의적이고 파행적인 당 운영을 계속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이들 당권파는 자신들의 잘못된 정치노선에 대한 반성과 파행적인 당 운영에 대한 반성을 회피하고 무마하는 데만 급급하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초점을 맞추어 재확인 평가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자주파를 비판하고 나선 신당파가 주도한 분당과정의 문제점이다. 신당파는 대선 패배 평가와 자주파의 패권주의 비판을 이른바 ‘종북주의’ 논란과 성급한 분당으로 몰고 감으로써 당 혁신이라는 자신의 명분조차 스스로 갉아 먹은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특히 신당파가 제기한 종북주의라는 쟁점은 그 자체의 뜻도 모호하거니와, 민주노동당의 모든 문제를 NL자주파의 대북 관련 정치노선의 책임으로 돌리는 데 급급한 주장이라는 면에서 납득하기 어렵고, 토론하기도 매우 곤란한 주장이다. 자주파의 조직적인 책임은 그동안 자행되어온 다수파의 패권주의적 파행적 조직운영에 대한 비판을 통해 촉구되어야 할 사안이었다. 물론 자주파의 퇴행적인 민족주의적 정치사상 노선에 대한 이념적 정치적 비판이 그러한 조직적 행태와 무관할 수 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대중적 토론과 비판을 통해 접근되고 달성되어할 과제이지, 모든 복잡다단한 정치적 논란과 토론의 과정을 종북주의라는 낙인을 찍어서 배제해버리는(혹은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바람몰이 정치로 대응해서는 곤란하다. 이는 당의 지도부와 정치노선에 대한 당원 대중의 다종다양한 의문과 불만을 때로는 지도부 일반에 대한 대중의 무차별한 반정치적 반감에 편승하고, 때로는 반공주의적이고 반북주의적인 대중 정서에 편승함을 통해, 지극히 파퓰리즘적인 방식으로 동원하고 소비해버리는 무책임한 처사였다.
결국 신당파의 이러한 공세는 자주파의 방어적 대응만을 강화시킴으로써 더 이상의 토론과 합의가 불가능한 상태를 초래할 뿐이었고, 분당이 종료된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토론이 아닌 서로에 대한 낙인찍기와 책임전가만이 횡횡하고 있다(‘미제의 간첩’이라든가, ‘종북주의자’라든가). 더욱이 이들 간의 대립과 분당 과정은 자기 정파 주도의 총선대응에 과도하게 몰입한 나머지 서로가 서로를 우경화 경쟁으로 내몰고, 서로가 책임질 수 없는 대중운동의 자기 파괴적 분열을 부채질하고 있다.
반성 없는 배타적 지지 고수방침과 충분한 대중적 토론을 거치지 못한 성급한 진보신당 창당과정의 문제점
진보신당은 지난 3월16일 창당대회를 열고, 당 공동대표단과 4.9총선 비례대표, 지역구 후보들을 인준하며 공식 출범했다. 출범과 동시에 신당은 평등-생태-평화-연대라는 가치를 새로운 진보정당의 중심 가치로 내세우고, 민주노동당의 성과와 한계를 계승하고 혁신하겠다는 비전을 밝혔다. 특히 안에서 말라 죽느니, 차라리 얼어 죽는 길을 택했다는 진보신당 활동가들의 선도 탈당과 분당의 변들은 사뭇 비장했다. 그러나 번개 불에 콩 구워 먹는 듯한 창당 과정의 모습은 탈당의 비장함이 과연 무엇을 위한 비장한 결단이었는지 의문스럽게 한다. 진보신당의 창당 과정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 운동에 대한 근본적 평가와 대안 형성에 대한 대중적 토론과 합의보다는 총선일정과 그에 대한 언론정치 이미지 형성을 중심에 놓고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다른 무엇보다도 분당 및 창당 과정의 성급함은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 철회와 관련된 논의상황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진보신당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소위 중앙파 노조활동가들의 다수가 활동 중인 금속노조와 공공연맹에서조차 ‘배타적 지지’ 관련 논의는 논의 유보되거나 공식 논의 안으로 상정되지도 못한 것이다. 실제로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대다수는 여전히 민주노동당 분당과 진보신당에 관해 제대로 납득하고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이자 현실적인 힘의 근원은 민주노총이라는 노동자대중조직의 조직적 지지와 지원이다. 하지만 진보신당은 이른바 “민주노총 당”을 벗어난다는 거꾸로 된 취지 아래, 민주노총 내부 토론과 대중적 합의를 생략하거나 또는 무시한 정치 행보를 성급하게 밀어붙인 것이다.
물론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 못지 않은 내부 혁신 과제들을 쌓아놓고 있는 형편인데다가, 우경적이고 코퍼러티즘적인 편향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오늘날 민주노동당의 분당사태와 전반적 우경화 역시 ‘민주노총으로부터의 전염’이라고까지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이 많다. 그런 면에서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관계는 혁신되어야 하는 관계다. 정당과 노조의 결합이 서로의 운동역량을 높이고 급진화하는 방향이 아니라, 서로를 갉아먹는 관계를 구성하고 있는 악순환의 고리를 타파하는 것이 관건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혁신과 아래로부터의 합의를 전제로 하지 않는 ‘배타적 지지’는 내용 없는 형식적인 협약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배타적 지지 철회와 당-노총 관계 재정립의 방향이 당-노총의 혁신이 아니라 소위 “‘민주노총당’ 탈피”이어서는 곤란하다. 물론 민주노총당 탈피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말하는 사람들마다 전혀 다를 수 있다. 배타적 지지 철회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근본적 반성 없이 자기정파의 패권적 지배력을 지키는 데 급급한 민주노총 지도부의 모습은 분명 ‘통일단결’을 외치는 자신들의 외침과 정반대로, 누구보다도 분열주의적이고 패권적인 행태이다.(특히 평생당원 이벤트나 진보신당을 표적으로 한 무리한 지역공천 등등) 그러나 조합원의 정치적 주체화와 관련된 대책과 노력 없이, ‘조합원의 정치적 자유’만을 외치는 것 역시, 자칫 형식적인 배타적 지지를 유지하는 것만도 못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나아가 종종 이른바 “비정규직 대변당”을 명분으로 내세우는 ‘민주노총당 탈피’가 자칫 노동자 대중운동 기반의 정당 조직구조 포기를 중심 내용으로 하는 한, 그것은 실제로는 ‘비정규직노동자의 정당’이 아니라 ‘탈 노동자정당화’, ‘탈 운동정당화’로 흐를 수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무엇을 적색화하고, 어떻게 재구성하겠다는 것인가
물론 다른 한편으로 신당은 스스로 신당의 성격에 대해 '총선 공동대응기구'이자 총선이후 본격 창당을 위한 ‘과도 정당’이라는 단서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목전에 닥친 총선에 우선 대응하되, 총선 이후 폭넓은 당내외 세력과 함께 평등-생태-평화-연대를 가치로 하는 새로운 진보정당을 확대 건설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적색으로, 보다 녹색으로’를 표방하는 진보신당이 아직까지 무엇을 민주노동당보다 적색화한 것인지, 진보의 재구성을 어떻게 이루고자 하는지는 불분명하다. 총선을 한 달여 앞두고 창당한 신당의 여건상 아직 많은 것이 준비되기 어려운 조건임을 감안하더라도, 지금까지 나타난 몇몇 모습들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우선 “서민세상을 열어가는 진보신당”이라는 명칭은 숱한 논란을 거쳐 채택된 ‘노동당’에 비해 볼 때 명백한 퇴보다. 남북관계 관련 정책보다는 소위 ‘민생정치’라는 경제정책 공약의 비중을 높이는 것을 적색이라고 여기는 이해하기 어려운 풍토마저 눈에 띤다. 전략공천 비례대표 명부 또한 선거를 앞둔 신당의 의도를 십분 감안해도 매우 우려스럽다. 한나라당의 꼿꼿장수(김장수 전국방장관)에 맞대응한다는 황당한 취지로 내세운 피우진 중령 공천은 도무지 무슨 함량미달의 언론정치인지 알 길이 없다. 지난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열린 우리당을 지지했던 인사들을 비례대표로 대거 내세운 민주노동당과 비교하여, 과연 어느 당의 행보가 더 우경적인지 경쟁하는 듯하다. 나아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이른바 '전략공천 부문할당 비례대표제'는 그 제도 자체가 과연 현 시기 진보정당의 합당한 후보 선출 방식인가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아야한다.
우선 부문할당 비례대표제는 거의 전적으로 미디어 정치로 이용되고 있는 형편이다. 당의 이념적, 정책적 지향과 정치적 지도력보다는 언론 노출 효과를 염두에 둔 명망성과 구색 맞추기, 여론 명분용 제도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정당 활동의 대표성과 책임성, 일관성을 해치며 나아가 당의 기반을 당원 대중운동으로부터 의원단 활동으로 변경하는 부정적 효과를 가진다.
둘째, 현재 남한 진보정당의 현실적 역량과 성장 정도를 감안할 때, 당을 대표하는 비례대표의 앞자리 순번을 부문할당 대표로만 채우는 것은 진보정당의 낮은 발전 정도를 적절히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실제 당을 대표하고 책임지는 정치활동을 좀 더 우선시해야 한다.
셋째, 부문할당제는 다양한 사회운동들, 특히 소수자운동에 대한 특별한 배려를 기본정신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자칫 이러한 노선은 사회운동들의 실질적 연합과 통합적 발전보다는 포스트주의적인(무정부적이고 해체주의적인) 무지개연합을 지향할 위험을 내포한다. 또한 그와는 다른 맥락에서 이해당사자 운동의 과제들과 상층 명망가들의 구색 맞추기에 그칠게 될 위험도 지닌다.
예컨대, 창조한국당은 이번 총선에서 필리핀 이주노동자 출신 후보를 비례대표 1번으로 전략공천 했고, 진보신당은 여성장애 활동가를 전략공천 했다. 진보신당과 창조한국당이 이주노동자 운동과 여성, 장애 운동을 대체하거나 대표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흐름은 사회운동의 정치적 역량과 기능을 외주화하고 정당에 위탁하게 되는 위험도 가질 수 있다.
민주노동당 분당 과정에서 적(정치적 경쟁자들)을 악마화하는 부정적 선동이 난무했다. 하지만 (당원)대중들의 반정치정서를 무차별적으로 동원하는 ‘진보 포퓰리즘’적인 정치 행태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공허하다. 민주노동당과 다르다는 주장 말고, 실제 이념과 운동을 어떻게 재건하겠다는 내용이 부재하다. 지금과 같은 양상이라면 총선 이후로 미루어진 ‘본격 창당’과 ‘진보의 재구성’이 어떤 기준과 내용으로 이루어질지 우려스럽다. 신당은 이미 총선에 모든 역량을 투여하고 있고, 총선의 성과를 바탕으로 '본격 창당'할 계획이다. 하지만 당의 이름조차 알리기 어려운 상황이니 이념과 정책보다는 노회찬, 심상정 전의원의 명망에 의지하고 있다. 명망성에 대한 의존은 신당을 노심당에 불과하게끔 하는 부정적인 측면과 함께 신당의 통합력을 유지해주는 역할을 한다. 진보신당의 전망은 노심의 지역구선거 당락 여부와 일정수준 이상의 정당득표율이 동시에 만족되지 않을 경우 매우 위태로울 수 있다. 예컨대, 노심이 지역구에서 선전하고 정당 지지율이 미비할 경우, 신당은 노심의 지도력 아래에서 통합력을 유지하겠지만 군소정당화 될 것이다. 반대로 노심의 지역구 성적이 기대 이하일 때는 굉장히 높은 정당 지지율을 얻지 못한다면 총선을 이끈 노심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지면서 재분열될 위험이 있다. 성급한 총선 전 창당과 총선 몰입이 낳은 딜레마이다.
문제는 정치위기다! 정치적 환멸에 빠진 노동자대중을 다시금 정치의 주체로!
최근 들어 자유주의자들조차 종종 거론하는 정치위기는 기존 정치제도의 위기를 뜻한다. 입법ㆍ행정ㆍ사법부의 권력분립을 통한 견제와 균형, 다원적인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정당과 이익집단의 매개가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질서다.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정치위기의 해소는 정당정치의 복원이고, 특히 중도 좌우파 양당체제의 황금기로의 귀환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치의 본질에는 계급적대가 존재하며, 따라서 오늘의 정치위기는 기존 지배질서가 더 이상 계급적대를 포섭하고 관리할 수 없는 심각한 무능력을 의미한다고 본다. 하지만 이는 역으로 민중운동에게는 계급운동을 형성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이념, 노선, 조직, 전략의 위기를 뜻한다(기존의 노조와 정당과 같이 제도화된 형태들의 위기). 따라서 대중의 정치적 환멸이란 곧 개인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집단적 운동 일반에 대한 거부나 무관심을 포함한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이 처한 곤란의 본질은 대중운동 쇠퇴의 정치적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본질적인 원인이다. 보다 구체적인 해법을 찾기 위한 위기 분석은 보다 구체적이고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고, 그 책임의 소재 역시 치열한 논란의 대상일 것이며, 그것을 밝히기 위한 작업은 곧 새로운 대안적 사회운동의 형성을 위한 도정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자주파와 진보신당파는 이러한 분석과 노력을 포기한 채 서로간의 책임 떠넘기기의 수렁에 빠지게 된 것이다.
당내 자주파와 평등파, 양자에 대해 좌익적인 관점에서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그룹들의 상당수는 자주파와 평등파가 공동으로 민주노동당의 의회주의적 변질을 자초했고, 창당의 기본 토대인 노동자대중운동과 분리된 것이 가장 커다란 위기의 원인이자 혁신의 지점이라는 데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로인해 혁신에 실패한 민주노동당과 성급한 진보신당을 넘어서는 이른바 “진정한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다시 시도되어야 한다는 일반론이 제기되곤 한다.
그러나 무엇이 “진정한 정치세력화”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매우 불투명하다. 또한 “진정한 정치세력화”가 곧 제3의 진보정당 건설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 당은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과는 또 무엇이 다른가에 답해야 할 것이다. 이에 의회주의, 개량주의가 아닌 변혁적인 진보정당, 혹은 비제도적인 투쟁정당, 혹은 사회주의노동자당이 진정한 정치세력화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다른 대안들이 모색되고 있다.
그러나 진보정당의 건설을 대중의 정치적 주체화의 전략적 목표로 대체해버린 ‘정치세력화’ 노선은 반신자유주의 사회운동의 정치적 급진화와 강화보다는 분열에 기여한 것은 아닌지 진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때이다. 민주노동당의 다수파와 신당파, 제3의 변혁적 정당파를 포함한 노동자운동 내 진보정치세력 일반이 처한 오늘의 현실의 곤란은 “진정한 정치세력화” 혹은 의회주의, 개량주의 세력과의 대결, 혹은 그들과의 분리정립이기 이전에 이른바 ‘정치위기’라 부를 수 있는 계급투쟁의 주객관적 조건의 근본적 곤란이다. 그의 핵심에는 대안전망의 상실 속에서 정치적 환멸에 빠진 대중이 있다.
다시 말해 민주노동당의 득표율 저하된 이유는 결국 투쟁을 통해 무언가를 얻지 못하고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한 대중의 실망과 좌절로부터 기원한 것이다. 경제위기하의 구조화된 패배주의, 대중의 정치 불신(반정치정서)의 심화라는 조건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직면한 민주노동당내 정치 그룹들은 위기에 빠진 사회운동을 정치적으로 강화하고 지원하기 보다는 탈 사회운동적인 길을 선택했고, (원외 노동자대중운동에 당의 중심을 두기보다는) 원내 활동이나 언론 이미지 메이킹에 집중했다. 그 결과 객관적인 어려움에 빠진 대중과 당의 분리는 확대 심화되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집권 자유주의 정치세력과의 동반몰락을 피할 수 없었던 민주노동당에게 남은 것은 선거결과에 대한 자주파와 중앙파간의 책임 공방이고, 자주파 지도부의 책임 회피에 대해 소수파인 중앙파의 일부는 종북주의를 지렛대로 하는 (선도탈당과) 분당의 길을 선택했다.
이 과정에서 의회주의/개량주의는 위기를 초래한 본질적 원인이 아니라, 위기를 왜곡 심화시킨 잘못된 선택이다. 즉 대중과 현장은 건강하고 변혁을 갈망하는데, 개량적이고 잘못된 지도부가 이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대중의 외면과 이탈이 발생한 것이 아니다. 만약 그 같은 상황이라면 사태는 개량적인 지도부를 교체하거나, 건강한(변혁적인) 대중을 대표할 수 있는 별도의 조직을 분리 건설하는 것을 통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현실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대중은 “민주노동당도 똑같은 정치인들이다”, “내 삶의 어려움이 민주노총의 투쟁, 민주노동당의 진보정치를 통해 해결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는 반정치적 반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공동의 집단적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가운데, 대안적 전망을 향한 토론과 연대를 포기한 대중들은 현실의 어려움들이 커져가는 과정에서 특정한 정치적 노선에 대한 비판과 경쟁이 아니라 모든 정치적 행위와 연대 자체를 기피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 자체, 즉 계급 형성과 계급 투쟁의 곤란이다. 따라서 사회운동의 복구와 재형성이 과제가 된다. 신당파의 자주파 비판이 잘못된 것은 자주파가 잘한 일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대중은 민주노동당(혹은 민주노총)의 혁신보다는 그것에 대한 거부와 이탈이라는 반정치적 정서를 분출했는데 이러한 폭발을 진보적이고 대안적인 방향으로 이끌기보다는 그것을 부추기고, 편승하고, 악화한 것이 신당파의 착각이고 오류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종 노심당이라고 불리는 진보신당은 총선 결과에 따라 또 다른 이탈과 분열을 재연할 우려가 크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긴급하고도 근본적인 과제는 현존하는 노동자운동 조직들과 대립되는 별도의 당을 새롭게 건설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과 정체성으로 분열되어있는 노동자운동 조직들 안에서 단호하고 급진적으로 활동하는 대안 좌파적인 분파들의 형성과 연합을 지향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지역과 현장에 기반한 변혁적 사회운동의 재형성에 주력해야한다. 나아가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사회주의 당파들을 포함하는 진보정당과 사회운동의 활동적이고 급진적인 대안 좌파적 분파들은 총선 이후 사회운동의 분열/분할이 강화되고 고착화되는 양상을 극복하고, 이념과 운동을 재건하기 위한 공동 논의와 모색에 나서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