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FTA를 둘러싼 정세에 관하여
이 진 경 / 고 병 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제국의 황혼?
제국의 시대가 시작된 것인가? 아니면 제국의 황혼이 다가온 것인가? 분명한 것은 적어도 경제적으로 미국이라는 단일한 중심의 지배가 와해되는 임계점을 넘어섰다는 사실이다. 유럽은 유로 체제를 출범시킴으로써 달러로부터 독립된 경제권을 만드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EU라는 지역적 국가연합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미국이라는 ‘국가연합’에 대응할 나름의 정치적 경제적 몸집을 갖춘 셈이다. 미국의 앞마당이었던 중남미는 미국의 다양한 전략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베네주엘라,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을 필두로 미국에서 독립된 국가를 향한 거대한 일보를 내디뎠고 심지어 미국에 대항하는 사회주의적 연대의 전선을 확대하고 있다. 다른 한편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를 통해 세계의 공장으로서 급속한 성장을 하고 있는 중국 또한 미국에서 벗어난 경제적 권역의 가능성을 슬며시 가시화하고 있다. 한때 한국 정부에서도 관심을 보였던 동북아 경제권의 가능성을, 혹은 아세안을 포함한 새로운 지역 경제권의 가능성을 그저 공허하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일부 세계체제론자들의 예측처럼 미국을 대신할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하려는 것일까? 이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은 급히 인도와의 결속을 시도하는 한편, 중국에 대한 정치·군사적 전략의 변환을 꾀하고 있지만, 그것이 중국의 부상 자체를 막기는 늦은 것 같다.
이런 사실들은 세계경제에서 미국의 중심적 지위가 이전과 달리 상대화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 자체의 경제 또한 점차 통제하기 힘든 위기의 징후를 보여주고 있다. ‘제국적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거대한 군사조직은 국가적 정치나 경제의 논리에서 벗어나 군사적 자기발전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며 국가 전체를 그 논리로 밀고 가고 있으며, 냉전을 대신한 ‘대테러전쟁’은 국가 자체를 군사적 조직의 메커니즘 아래 장악하여 일종의 절대적 전쟁으로, 항상적인 총력전 체제로 변환시켰다. 이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는 거대한 비용을 군사예산에 투여하고 있으며(2007년도 분으로 책정된 펜타곤만의 예산이 4393억달러이다. 여기에는 이라크 전비, 다른 부처에서 사용하는 사실상의 국방관련 예산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를 고려하면 국방예산은 7500억달러를 넘어서며 심지어 어떤 추정에 따르면 2조달러를 넘어선다.), 이로 인해 한 해 재정적자는 이미 GDP의 6%를 넘어섰고(약 4천억달러), 누적된 적자가 8조달러(우리돈 8천조원)를 넘어섰다.
무역적자 역시 거대해서 이미 연간 7250억 달러를 넘어섰다. 무기산업을 제외한 제조업은 이미 쇠락한지 오래고, 자본은 금융화되어 투기적 이윤을 찾아 전세계를 떠돌고 있다. 그리고 저축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다. 즉 저축에 비해 소비나 투자가 과잉된 상태다. 그 부족분은 달러의 추가발행이나 채권의 발행으로 메우고 있다. 요컨대 미국경제는 민간 경제에서는 자본 자체가 금융화되어 생산과 분리된 채 미국이란 경계를 넘나들며 투기적 자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국가가 달러를 찍어내고 국채를 발행하여 그 돈으로 거대한 군사비용을 지출하는 한편 외국의 상품을 수입하여 인민들의 소비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했던 것처럼 군사적 낭비경제를 통해 부실화된 경제를 빚과 달러로 억지로 유지하는 체제인 셈이다. 이로 인해 달러가치는 매우 낮아져서 몇몇 나라에서 달러보유고를 약간 낮추려는 시도만 해도 달러가치가 폭락할 위험이 상존한다. 하지만 거대한 채무나 무역수지 적자 때문에 달러가치를 올릴 수도 없는 상황이다.
예전이라면 인위적 달러 감가를 통해서 채무를 줄이고 무역적자를 줄이는 것도 가능했지만(1985년의 플라자 합의), 유로처럼 달러를 대신할 수 있는 통화가 존재하는 상황이어서 지금은 그러한 시도가 달러 자체의 기축통화 지위를 위협할 수 있다. 이란에서 달러 아닌 유로를 결제통화로 사용하는 석유시장을 개장하려 한 것은 이런 상황의 심각성이 임계점에 다다랐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전쟁을 비롯하여 군사와 전쟁 등의 비생산적 지출은 증가세를 전혀 늦추지 않고 있다. 그래서인지 찰머스 존슨처럼 미국 내부에도 이미 파국을 예측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심판의 날은 이미 다가 왔다.”
제국과 그 이웃들
정말 미국이 파국으로 치달을 것인가? 제국의 황혼이 다가온 것인가? 최소한 확실한 것은 미국이 이전과 같은 경제적 위상을 지속하기는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태를 반영하는 양, 이라크 전에서 미국의 정치적·군사적 요구는 유럽을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거절당했다. 복수의 중심, 다극화된 체제는 불가피하다. 유럽이 EU라는 거대 공동체를 구축함에 따라 미국도 거대한 지역연합인 미주공동체를 시도했다. 그러나 나프타(NAFTA)의 나쁜 선례는 중남미의 많은 나라들로 하여금 막대한 정치·경제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FTA를 거절하고 정치적으로도 독립적인 위치를 확보하게 했다. 미주공동체에 대한 미국의 꿈은 실패로 귀착될 것 같다. 나아가 이라크 전쟁의 장기화는 미국의 정치·경제적 부담을 점점더 가중시키고 있으며, 점증하는 이슬람 민족주의는 중동지역이 미국의 거대한 수렁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일본은 미국 중심의 체제에서 경제적 이득을 얻으면서 그 체제를 유지해주었지만(일본의 경제적 이득의 거대한 부분이 미국의 국채매입에 투여되었다), 플라자 합의에 따른 엔고로 인해 10여년의 장기불황을 겪으면서 경제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자동차는 아직도 강력한 위치를 유지하고 있지만 전자산업을 비롯한 첨단부문에서 이미 확고했던 선두의 자리를 내주기 시작했다. 한국과 중국에 대한 일본의 민족주의적 반감을 이러한 경제적 감소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보인다. 이는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정치적 위상을 더욱더 약화시키고 있다. 이런 점에서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일본만으로는 중국을 견제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다른 한편 한국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대북관계의 매개자로서) 중국과의 관계가 점차 강화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한국이 중국과 긴밀한 관계가 형성될 경우, 비록 일본이 미국과의 관계 속에서 버텨준다고 해도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은 자칫하면 미국에 대항하는, 혹은 적어도 미국의 영향권에서 상대적으로 벗어난 국가적 연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아마 미국으로서는 가장 피하고 싶은 또 하나의 현실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미국은 한편으로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합의를 얻어내 군사전략의 변환을 완수하는 한편, 중국을 겨냥한 전략적 변환의 군사적 거점으로서 새로운 기지를 구축하고자 한다. 항공과 항만으로 연결가능한 평택으로 주한미군 기지를 이진·통합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이 최근 한국에서 군사적 전략을 전환시켜 작전가능성의 범위를 동북아 전역으로 확대하고, 공세적 유연성과 기동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것 역시 이와 동일한 맥락에 있을 것이다. 한국과의 경제적 관계를 강화하려는 것은 결코 이와 무관할 수가 없다. 정부에서도 말하듯이 그것은 군사적 성격을 포함하는 한미동맹의 관점에서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이 한미FTA를 규정하는 국제적 조건이다.
저무는 제국의 막차를 타다!
미국이 6자회담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끊임없이 북한에 대한 공격의 어조를 줄이지 않는 것은 단지 북한에 대한 위협만은 아닐 것이다. 북한 이상으로 그것은 남북관계의 개선에 명운을 걸고 있는 남한 정부에게 아찔한 위협일 것이다(그리고 그것은 남북관계를 연결하며 두 나라, 특히 남한과 정치적 위상을 강화하려는 중국에 대한 견제의 의미 또한 포함할 것이다). 이로 인해 미국으로부터 자주외교를 ‘선언’했던 노무현 정부는 황급히 그 선언을 철회하고 미국와의 동맹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남북관계를 진전시키는 전략을 채택했다. 여기서 대미관계를 강화하여 북한에 대한 공격을 막아보겠다는 ‘사명감’을 읽어내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미국과 안보동맹을 체결하여 미국으로부터의 위험을 막아내야 하는 역설!
이런 정황은 참여정부가 ‘올인’이라는 극단적 표현을 써가면서, 그리고 ‘참여정부’란 이름이 무색하게 배제적이고 일방적인 방식으로 한미FTA를 추진하는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정부관료들이 자랑스럽게 떠들듯, 한미FTA는 경제동맹이면서 동시에 안보동맹이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로 한반도를 평화롭고 안전하게 만들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미국으로부터의 즉각적인 안전은 중국과의 중장기적 불안을 준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중국이 현재 한미관계에 대해 경계의 수위를 올리면서 러시아와의 관계를 급속히 강화하고 있는 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언제부턴가 한국 경제에 있어 ‘중국기회론’(중국의 무서운 성장을 우리 경제 발전의 동력으로 이용하자는 것)은 ‘중국위협론’(중국이 우리를 이미 추격했으며 우리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이 변질에 관여한 관료들의 추한 권력 게임은 일단 제쳐두자. 백번 천번 양보해서 노무현 말대로 중국 제조업의 ‘위협’을 따돌리기 위해 서비스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하자. 그러나 정말 그것만이 문제였다면, 우리 사회를 총체적 위험에 빠뜨리는 전면적 경제통합협정인 FTA보다는 선진서비스기술 이전을 유리한 조건에서 유도할 수 있는 DDA가 더 나았을 것이다(물론 미국은 이것에 강하게 반대할 것이다). 경제적 이유만으로 한미FTA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한국정부의 담당자들이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지금 FTA 관련 로드맵이 한미 군사동맹의 전략적 변환과 동시에 진행되고 있음에 특별히 주목해야 한다.
한미FTA에 대한 반대를 ‘패배주의’로 몰아붙이는 정부 관계자들에게, 우리가 더 걱정하는 것은 협상의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미FTA는 그것이 ‘잘 될’ 경우에조차 한국과 미국의 경제적 통합을 가속화함으로써 미국경제와 한국경제를 연동시킬 것이며, 그럼으로써 미국경제와 한국경제의 명운을 함께 가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일단 세계경제적 관점에서 보자면, 저물기 시작하는 제국의 경제에 편승하기 위해 ‘막차를 타는 것’이다. 한쪽 끝이 이미 침몰하기 시작한 항공모함에 거대한 승선료를 내고 올라타는 것이다(뜨는 해와 저무는 해를 구별하는 게 그토록 어려운 일일까?). 설혹 이런 예측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최소한 쌍둥이 적자와 달러 지위의 동요 등으로 상징되는 위기를 항상 잠재적으로 안고 있는 미국경제의 직접적 영향권 안에 그대로 편입되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것은, 나프타를 통해 그 길을 앞서 간 멕시코의 경우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미국경제의 위기가 곧바로 한국 경제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위기로 전환되는 관계 속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2001년~02년 결코 심각하다고는 할 수 없었던 미국의 일시적 경기침체에도 멕시코의 경제는 생산과 고용이 격감하는 몸살을 감수해야 했다(멕시코의 GDP 1% 감소, 1인당 GDP 2.5% 감소, 미국경제에 직결된 마킬라도라에선 생산과 고용이 각각 9.2%, 20% 감소했다). 더불어 미국이 군사적 투여와 개발, 전쟁을 통해서만 경제의 활력을 유지할 수 있음을 안다면, 미국민이 경제적 이유에서 군사적 확장을 지지하듯이 한국 역시 경제적 이유에서라도 항상 미국이 벌이는 전쟁이나 군사개발을 지지해야 하는 때늦은 군사주의에 흡수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는 점 또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한미FTA, 이념적 선택!
다른 한편 우리가 보기에 한미FTA 추진의 주요 논리 중의 하나인 ‘중국위협론’의 시각은 정확하게 미국의 입장을 한국의 것으로 동일시하고 받아들인 것에 다름 아니다. 중국경제의 성장이 위협이 되는 것은, 바로 그 이웃에서 중국경제에 ‘성공적으로’ 진입하여 그 성장을 자국 경제의 추동력으로 연결시킬 수 있었던 한국이 아니라, 앞서 본 것처럼 세계경제에서 그것을 자신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미국경제의 입장이며, 나아가 그것을 정치·군사적으로 해석하여 자신의 영향력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해야 했던 미국 정부의 입장이지 중국으로 인해 남북관계의 매개적 중간지대를 확보할 수 있었던 한국 정부의 입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중국의 제조업의 추격을 위협으로 느끼며 그것을 이미 포기하려는 ‘패배주의적’ 전략(‘패배주의’는 FTA 반대자들의 것이 아니라 FTA 지지자들의 것이다!)에 대해, 한국 경제의 내부에 침투하여 그것의 성장을 자신의 성장으로 연동시킬 수 있었던 일본의 경우를 들어 반박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좀더 근본적인 문제는 중국의 성장에 대한 전략 이전에 그러한 성장을 적대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입지점이 아닐까? 미국을 통해 경제성장의 다른 동력을 찾으려는 시도조차, 미국과의 동일시가 아니라 미국을 변수의 하나로 고려할 수 있는 시선이 없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음을 다시 지적해야 할까? 다른 한편 서비스업의 선진화로 경쟁력을 확보하자는 화려한 주장에 가려 제조업을 포기한다는 말의 무서운 의미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제조업에 고용되어 있던 사람들, 덧붙여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서비스업으로 선진화된 경제에선 어떻게 될까? 60 넘은 농민들이 은행이나 컨설팅 회사에서 일하는 멋진 미래를 꿈꾸고 있는 것일까? 선진화된 법률사무소나 컨설팅 회사, 보험회사, 은행 등이 이들의 일자리를 충분히 마련해줄 수 있을까? 그런 실업의 증가는 경제의 선진화를 위해선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감수해야 할까? 그렇다면 그런 ‘선진화’, 그런 FTA는 대체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것인가?
이런 점에서 현재 추진되는 한미FTA는 전략적 선택이 아니라 차라리 ‘이념적 선택’으로 보인다. 아메리카니즘이라는 이념. 사실 FTA란 바로 교역조건을 통해 관철시키고자 하는 집단적 이익의 집합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단적 이익에 의해 한미FTA가 방해받아선 안된다”는 노무현의 태도는 그것이 이익 극대화를 위한 전략적 선택이 아니라 이익을 떠난(떠났다고 생각하는) 이념적 선택임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단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남북관계에 대한 ‘사명감’(혹은 ‘한건주의’)과 아메리카니즘이라는 이념, 이것이 ‘운동권 출신’임을 자처하고 ‘참여정부’를 자칭하는 현 정부가 모든 이익집단의 요구에 귀를 막고, 농민을 비롯한 수많은 민중들의 거대한 함성에도 귀를 틀어막고 오직 한 길로 ‘올 인’하는 근본적인 추동력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념적 선택이 실용주의적이고 전략적인 선택을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 한미FTA를 밀어붙이고 있는 고위급 경제·통상관료들의 경우 좀더 심각하고 치명적인 방식으로 드러난다. 현재 한국의 민주주의, 즉 데모크라시(democracy)는 사실상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로 전환되고 있다. 테크노크라트, 즉 기술관료들에 의해 민중(데모스demos)의 추방이 이루어지고 있다. 테크노크라트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예외상태(state of exception)’를 설정함으로써 민중적 통제에서 벗어나 자기들의 구상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들은 ‘늦으면 도태된다’거나 ‘언제까지 협상을 완료해야 한다’는 식으로 요란하게 긴급 상황(예외상태!)임을 주장하면서, 그리고 협상 전 우리 전략을 노출해선 안된다면서 ‘비밀주의’(예외상태!)를 주장함으로써 자기의 지배력을 확대하고 있다. 현재 의회는 완전히 무기력하며(그들은 FTA에 대해 국민보다도 무지하다!), 테크노크라트들을 통제하기는커녕 그들의 행동에 대한 이념적·도덕적 장식물이 되고 있다. 대통령조차 뒤늦게 보고받고 설득되는 관료들의 지배체제가 서서히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모든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고 오직 국민의 이익을 실증적으로만 연구한다는 관료들은 이미 자기 이익을 위해 데이터들을 조작하여 멀쩡한 은행을 헐값에 매각하는 일도 서슴지 않고 있다. 그러나 테크노크라시 사회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너무 늦게’ 밝혀진다. 사태는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엉망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려진다. 한미FTA가 이와 다르리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우리는 달리 어쩔 도리가 없는 상황 속으로 점점 빠져들고 있는 건 아닐까? 기술관료들의 도덕과 애국심을 우리가 여전히 믿어야 할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도덕적이고 애국적일 때조차, 또 그들이 진정으로 자기이익과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고자 노력할 때조차, 그들은 ‘아메리카니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지식이나 학문, 그들이 판단 기준이 모두 미국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들 대부분은 미국에 유학했거나 미국 학문의 세례 속에서 자랐다. 그들은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운 객관적 판단을 내린다고 하지만, 그럴 때조차 그 객관적 판단의 기준은 철저히 미국적인 것이다. 이것이 한미FTA처럼 그토록 준비되지 않은 심각하고 거대한 일을 일년도 안되는 기간 안에 제대로 된 연구보고서 없이도 과감하게 추진하는 이유인 것이다.
또 다시 ‘민족’의 이름으로?
물론 한미FTA가 강력하게 추진되는 이유가 이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 동안 역사에 남을 무언가를 하고자 했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한 게 없는 노무현 정부로서는,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동안 크게 눈에 띄는 가시적인 성과를 얻을 무언가가 필요했다(노무현이 자주 사용하는 ‘올 인’이라는 단어는 이런 태도를 단적으로 표현한다). 아마도 남북관계의 진전은 이를 위한 가장 손쉬운, 그리고 가장 가시적인 효과를 갖는 대답거리를 제공했을 것이 분명하다. 제2차 정상회담의 개최, 혹은 개성공단을 확장하여 거기서 생산된 것을 한국산 제품으로 표시하여 미국에 판매하는 것. 특히 후자는 남한 자본에게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북한을 남한의 경제적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효과를 가질 뿐 아니라, 경제적 궁지에 몰린 북한에 대해서도 상해와 같은 자유경제구역보다 훨씬 통제하기 쉬운 조건으로 경제적 활로를 열어줄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훌륭한 ‘윈-윈 게임’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그토록 거대한 비용을 치러야 함에도 불구하고, 미친 듯이 몰래 숨어서 FTA를 추진하는 ‘경제적’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아마도 ‘민족해방’을 자신의 징표로 삼는 한국의 일부 운동권 세력이 어이없게도 미국에 대한 투쟁이 가장 시급한 이 사안에 대해서 반미투쟁을 선도하기는커녕 ‘조건적 지지’의 입장에 서려는 이유일 것이다. 한미FTA가 북한에 개성공단이라는 숨구멍을 열어준다면 그것을 지지할 수 있다는 입장. 더불어 이를 통해 남북한 긴장을 완화하고 군축을 유도함으로써 과도한 국방비를 줄일 수 있다면, 사회 양극화 해소를 위한 재원을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 민족과 통일이라는 이름으로 반미를 부르짖어오던 이들이 다시 민족과 통일이라는 이름으로 미국과 손을 잡으려는 괴이한 역사적 아이러니를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런 점에서 한미FTA는 민족주의 진영에 일종의 균열을 야기할지도 모른다. 반미라는 민족주의적 성향과 통일운동이라는 민족주의적 성향의 분할이 발생할 가능성을, 이미 사태가 여기에 이른 지금 대체 누가 없다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 경우 한미FTA는 민족주의 진영의 동요와 분열이 시작될 계기로 자리잡을 것이다. 노파심에 말하자면, 이는 한국의 민족주의가 우익의 이념으로 자리잡는 전형적인 근대적 배치로 변환되는 문턱이 될 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과거의 우익들, 정말 지킬 거라곤 자기 눈앞의 이익밖엔 없는 친미·반공주의자들을 대신해서, 말 그대로 민족이란 이름으로 호명하고 사고하는 전형적 우익들이 한국의 정치지형에서 보수파의 자리를 차지하는 이동과 변환이 출현하게 되는 게 아닐까? 반미 없는 민족해방파의 출현은, 말 그대로 ‘친미민족주의’ 내지 최소한 ‘비-반미 민족주의’가 한국의 정치지형에서 실질적인 존재로 가시화되기 시작하는 하나의 징후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제 투쟁의 주체와 투쟁이 요구해야 할 권리에 대한 고민으로 나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 한미FTA는 투쟁의 주체와 관련해서 우리에게 중요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우리 투쟁을 빛바랜 민족해방투쟁의 지평에 가두어선 안된다. 민족이 투쟁의 주체로 호명되는 것은 여러모로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민족주의 세력 중 일부가 보이고 있는 한미FTA에 대한 불안정한 태도는 투쟁의 전선에 대한 잠재적 위협이 될 것이다. 한미FTA에 반대하는 이유가 단지 민족적 자존심이나 민족적 자립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남북정상회담이나 남북경제협상, 6자회담 등의 문제가 가시화될 때 투쟁이 그 침로를 상실하게 되리라는 것은 불문가지다.
더욱이 투쟁 주체로서 민족을 호명하는 것은, ‘도래할 FTA의 재앙’을 ‘이미’ 체험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소수자들의 문제를 은폐하는 효과를 낼 것이다.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온 것처럼 보이는 FTA는, 경제학적 총량지표와 경제적 이득의 계산, 그리고 시장과 경쟁력,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장애인들, 이주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여성들, 청년들, 그리고 갯벌에 사는 생명체 모두에게 이미 오래 전에 찾아왔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그들에 대한 착취를 조장하거나 방조했음을 깨달아야 한다. 한미FTA는 그 재앙의 규모와 강도를 더할 수 없는 최대치로 증폭시킴으로써 남 얘기로 쉽게 치부하던 문제가 결코 남 얘기가 아님을 알려주는 전령인 셈이다. 따라서 FTA에 대한 투쟁은 민족이 아니라 이 모든 소수자들로부터, 이 모든 민중들, 이 모든 대중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한미FTA를 통해 불모화될 우리 자신의 삶, 대중의 삶, 나아가 생명 전체의 문제를 직시하고 그것과 결부하여 투쟁해야 한다. FTA를 통해 발생하게 될 농민층의 대대적 붕괴, 그리고 유전자조작식품이나 환경문제 등으로 인해 위협에 처할 우리의 생명 활동 자체, 그리고 FTA와 더불어 본격화될 노동, 보건 및 의료 문제, 문화적 자생력의 문제 등등, 모든 집단적 이익 전체를 하나로 모으며, FTA라는 허구적 전체 이익에 대해, GDP 같은 총량적 경제지표나 남북관계나 ‘경쟁력’ 같은 이데올로기적 개념으로 선전되는 ‘보편적 이익’에 대항하여, 우리 자신의 삶 하나하나와 결부된 ‘구체적 이익’의 문제를 통해 사유하고 행동해야 한다. 더불어 이러한 생존과 생활의 문제를 생명의 문제로, 우리 자신의 생명력을 확보하고 수호하기 위한 ‘생명권’, ‘삶의 권리’ 문제로 제기해야 하며, 이를 통해 자신이 살고 싶은 곳에서 살려는 평택 농민들의 투쟁, 개발의 미명 아래 죽음으로 밀려가는 새만금 갯벌의 생명체들의 생존을 생명의 권리로서 함께 사유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투쟁의 의지를 확고히 하는 한, 아마도 한미FTA는 그로 인해 예상되는 피해범위의 광범위함으로 인해 지금까지 흩어진 채 산개되어 진행되던 한국의 사회운동을 다시 하나로 집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들 각자의 이익에서 시작하지만 우리 자신의 이익을 넘어서 타인들의 이익을 배려하는 연대의 계기, 우리의 생존을 넘어서 우리와 생명체들의 생존과 생명까지 나의 문제로 고려하고 배려하는 연대의 계기, 그리고 그러한 연대가 혁명적 열정으로 응집될 수 있는 ‘응축’의 계기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3개월만에 집결된 투쟁의 대열은 이러한 예견에 대한 강력한 증거일 것이다.
반면 준비되지 않는 만큼 오직 비공개와 비밀주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저 개방하는 것 말고는 협상의 기술조차 갖지 못한 관료들의 무능력과,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별 관심도 없고 아는 것도 없이 그저 FTA 해야 한다는 ‘이념적’ 당위론만을 떠들고 있을 뿐인 보수파들의 대응은, 내용이 없어서 깨부술 게 별로 없다는 기이한 난점만을 제외한다면, 아주 취약한 것임이 분명하다. 설득할 수 있는 내용이나 자료의 부재로 상징되는 관료들의 무능력은 이미 대중은 물론 보수파나 여당 의원들 눈에까지 가시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중간층의 동요까지 나타나고 있다. 아마도 우리는 오래간만에 가시적인 승리를 쟁취하는 투쟁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이 진 경 / 고 병 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제국의 황혼?
제국의 시대가 시작된 것인가? 아니면 제국의 황혼이 다가온 것인가? 분명한 것은 적어도 경제적으로 미국이라는 단일한 중심의 지배가 와해되는 임계점을 넘어섰다는 사실이다. 유럽은 유로 체제를 출범시킴으로써 달러로부터 독립된 경제권을 만드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EU라는 지역적 국가연합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미국이라는 ‘국가연합’에 대응할 나름의 정치적 경제적 몸집을 갖춘 셈이다. 미국의 앞마당이었던 중남미는 미국의 다양한 전략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베네주엘라,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을 필두로 미국에서 독립된 국가를 향한 거대한 일보를 내디뎠고 심지어 미국에 대항하는 사회주의적 연대의 전선을 확대하고 있다. 다른 한편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를 통해 세계의 공장으로서 급속한 성장을 하고 있는 중국 또한 미국에서 벗어난 경제적 권역의 가능성을 슬며시 가시화하고 있다. 한때 한국 정부에서도 관심을 보였던 동북아 경제권의 가능성을, 혹은 아세안을 포함한 새로운 지역 경제권의 가능성을 그저 공허하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일부 세계체제론자들의 예측처럼 미국을 대신할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하려는 것일까? 이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은 급히 인도와의 결속을 시도하는 한편, 중국에 대한 정치·군사적 전략의 변환을 꾀하고 있지만, 그것이 중국의 부상 자체를 막기는 늦은 것 같다.
이런 사실들은 세계경제에서 미국의 중심적 지위가 이전과 달리 상대화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 자체의 경제 또한 점차 통제하기 힘든 위기의 징후를 보여주고 있다. ‘제국적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거대한 군사조직은 국가적 정치나 경제의 논리에서 벗어나 군사적 자기발전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며 국가 전체를 그 논리로 밀고 가고 있으며, 냉전을 대신한 ‘대테러전쟁’은 국가 자체를 군사적 조직의 메커니즘 아래 장악하여 일종의 절대적 전쟁으로, 항상적인 총력전 체제로 변환시켰다. 이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는 거대한 비용을 군사예산에 투여하고 있으며(2007년도 분으로 책정된 펜타곤만의 예산이 4393억달러이다. 여기에는 이라크 전비, 다른 부처에서 사용하는 사실상의 국방관련 예산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를 고려하면 국방예산은 7500억달러를 넘어서며 심지어 어떤 추정에 따르면 2조달러를 넘어선다.), 이로 인해 한 해 재정적자는 이미 GDP의 6%를 넘어섰고(약 4천억달러), 누적된 적자가 8조달러(우리돈 8천조원)를 넘어섰다.
무역적자 역시 거대해서 이미 연간 7250억 달러를 넘어섰다. 무기산업을 제외한 제조업은 이미 쇠락한지 오래고, 자본은 금융화되어 투기적 이윤을 찾아 전세계를 떠돌고 있다. 그리고 저축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다. 즉 저축에 비해 소비나 투자가 과잉된 상태다. 그 부족분은 달러의 추가발행이나 채권의 발행으로 메우고 있다. 요컨대 미국경제는 민간 경제에서는 자본 자체가 금융화되어 생산과 분리된 채 미국이란 경계를 넘나들며 투기적 자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국가가 달러를 찍어내고 국채를 발행하여 그 돈으로 거대한 군사비용을 지출하는 한편 외국의 상품을 수입하여 인민들의 소비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했던 것처럼 군사적 낭비경제를 통해 부실화된 경제를 빚과 달러로 억지로 유지하는 체제인 셈이다. 이로 인해 달러가치는 매우 낮아져서 몇몇 나라에서 달러보유고를 약간 낮추려는 시도만 해도 달러가치가 폭락할 위험이 상존한다. 하지만 거대한 채무나 무역수지 적자 때문에 달러가치를 올릴 수도 없는 상황이다.
예전이라면 인위적 달러 감가를 통해서 채무를 줄이고 무역적자를 줄이는 것도 가능했지만(1985년의 플라자 합의), 유로처럼 달러를 대신할 수 있는 통화가 존재하는 상황이어서 지금은 그러한 시도가 달러 자체의 기축통화 지위를 위협할 수 있다. 이란에서 달러 아닌 유로를 결제통화로 사용하는 석유시장을 개장하려 한 것은 이런 상황의 심각성이 임계점에 다다랐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전쟁을 비롯하여 군사와 전쟁 등의 비생산적 지출은 증가세를 전혀 늦추지 않고 있다. 그래서인지 찰머스 존슨처럼 미국 내부에도 이미 파국을 예측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심판의 날은 이미 다가 왔다.”
제국과 그 이웃들
정말 미국이 파국으로 치달을 것인가? 제국의 황혼이 다가온 것인가? 최소한 확실한 것은 미국이 이전과 같은 경제적 위상을 지속하기는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태를 반영하는 양, 이라크 전에서 미국의 정치적·군사적 요구는 유럽을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거절당했다. 복수의 중심, 다극화된 체제는 불가피하다. 유럽이 EU라는 거대 공동체를 구축함에 따라 미국도 거대한 지역연합인 미주공동체를 시도했다. 그러나 나프타(NAFTA)의 나쁜 선례는 중남미의 많은 나라들로 하여금 막대한 정치·경제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FTA를 거절하고 정치적으로도 독립적인 위치를 확보하게 했다. 미주공동체에 대한 미국의 꿈은 실패로 귀착될 것 같다. 나아가 이라크 전쟁의 장기화는 미국의 정치·경제적 부담을 점점더 가중시키고 있으며, 점증하는 이슬람 민족주의는 중동지역이 미국의 거대한 수렁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일본은 미국 중심의 체제에서 경제적 이득을 얻으면서 그 체제를 유지해주었지만(일본의 경제적 이득의 거대한 부분이 미국의 국채매입에 투여되었다), 플라자 합의에 따른 엔고로 인해 10여년의 장기불황을 겪으면서 경제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자동차는 아직도 강력한 위치를 유지하고 있지만 전자산업을 비롯한 첨단부문에서 이미 확고했던 선두의 자리를 내주기 시작했다. 한국과 중국에 대한 일본의 민족주의적 반감을 이러한 경제적 감소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보인다. 이는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정치적 위상을 더욱더 약화시키고 있다. 이런 점에서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일본만으로는 중국을 견제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다른 한편 한국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대북관계의 매개자로서) 중국과의 관계가 점차 강화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한국이 중국과 긴밀한 관계가 형성될 경우, 비록 일본이 미국과의 관계 속에서 버텨준다고 해도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은 자칫하면 미국에 대항하는, 혹은 적어도 미국의 영향권에서 상대적으로 벗어난 국가적 연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아마 미국으로서는 가장 피하고 싶은 또 하나의 현실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미국은 한편으로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합의를 얻어내 군사전략의 변환을 완수하는 한편, 중국을 겨냥한 전략적 변환의 군사적 거점으로서 새로운 기지를 구축하고자 한다. 항공과 항만으로 연결가능한 평택으로 주한미군 기지를 이진·통합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이 최근 한국에서 군사적 전략을 전환시켜 작전가능성의 범위를 동북아 전역으로 확대하고, 공세적 유연성과 기동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것 역시 이와 동일한 맥락에 있을 것이다. 한국과의 경제적 관계를 강화하려는 것은 결코 이와 무관할 수가 없다. 정부에서도 말하듯이 그것은 군사적 성격을 포함하는 한미동맹의 관점에서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이 한미FTA를 규정하는 국제적 조건이다.
저무는 제국의 막차를 타다!
미국이 6자회담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끊임없이 북한에 대한 공격의 어조를 줄이지 않는 것은 단지 북한에 대한 위협만은 아닐 것이다. 북한 이상으로 그것은 남북관계의 개선에 명운을 걸고 있는 남한 정부에게 아찔한 위협일 것이다(그리고 그것은 남북관계를 연결하며 두 나라, 특히 남한과 정치적 위상을 강화하려는 중국에 대한 견제의 의미 또한 포함할 것이다). 이로 인해 미국으로부터 자주외교를 ‘선언’했던 노무현 정부는 황급히 그 선언을 철회하고 미국와의 동맹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남북관계를 진전시키는 전략을 채택했다. 여기서 대미관계를 강화하여 북한에 대한 공격을 막아보겠다는 ‘사명감’을 읽어내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미국과 안보동맹을 체결하여 미국으로부터의 위험을 막아내야 하는 역설!
이런 정황은 참여정부가 ‘올인’이라는 극단적 표현을 써가면서, 그리고 ‘참여정부’란 이름이 무색하게 배제적이고 일방적인 방식으로 한미FTA를 추진하는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정부관료들이 자랑스럽게 떠들듯, 한미FTA는 경제동맹이면서 동시에 안보동맹이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로 한반도를 평화롭고 안전하게 만들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미국으로부터의 즉각적인 안전은 중국과의 중장기적 불안을 준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중국이 현재 한미관계에 대해 경계의 수위를 올리면서 러시아와의 관계를 급속히 강화하고 있는 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언제부턴가 한국 경제에 있어 ‘중국기회론’(중국의 무서운 성장을 우리 경제 발전의 동력으로 이용하자는 것)은 ‘중국위협론’(중국이 우리를 이미 추격했으며 우리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이 변질에 관여한 관료들의 추한 권력 게임은 일단 제쳐두자. 백번 천번 양보해서 노무현 말대로 중국 제조업의 ‘위협’을 따돌리기 위해 서비스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하자. 그러나 정말 그것만이 문제였다면, 우리 사회를 총체적 위험에 빠뜨리는 전면적 경제통합협정인 FTA보다는 선진서비스기술 이전을 유리한 조건에서 유도할 수 있는 DDA가 더 나았을 것이다(물론 미국은 이것에 강하게 반대할 것이다). 경제적 이유만으로 한미FTA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한국정부의 담당자들이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지금 FTA 관련 로드맵이 한미 군사동맹의 전략적 변환과 동시에 진행되고 있음에 특별히 주목해야 한다.
한미FTA에 대한 반대를 ‘패배주의’로 몰아붙이는 정부 관계자들에게, 우리가 더 걱정하는 것은 협상의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미FTA는 그것이 ‘잘 될’ 경우에조차 한국과 미국의 경제적 통합을 가속화함으로써 미국경제와 한국경제를 연동시킬 것이며, 그럼으로써 미국경제와 한국경제의 명운을 함께 가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일단 세계경제적 관점에서 보자면, 저물기 시작하는 제국의 경제에 편승하기 위해 ‘막차를 타는 것’이다. 한쪽 끝이 이미 침몰하기 시작한 항공모함에 거대한 승선료를 내고 올라타는 것이다(뜨는 해와 저무는 해를 구별하는 게 그토록 어려운 일일까?). 설혹 이런 예측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최소한 쌍둥이 적자와 달러 지위의 동요 등으로 상징되는 위기를 항상 잠재적으로 안고 있는 미국경제의 직접적 영향권 안에 그대로 편입되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것은, 나프타를 통해 그 길을 앞서 간 멕시코의 경우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미국경제의 위기가 곧바로 한국 경제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위기로 전환되는 관계 속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2001년~02년 결코 심각하다고는 할 수 없었던 미국의 일시적 경기침체에도 멕시코의 경제는 생산과 고용이 격감하는 몸살을 감수해야 했다(멕시코의 GDP 1% 감소, 1인당 GDP 2.5% 감소, 미국경제에 직결된 마킬라도라에선 생산과 고용이 각각 9.2%, 20% 감소했다). 더불어 미국이 군사적 투여와 개발, 전쟁을 통해서만 경제의 활력을 유지할 수 있음을 안다면, 미국민이 경제적 이유에서 군사적 확장을 지지하듯이 한국 역시 경제적 이유에서라도 항상 미국이 벌이는 전쟁이나 군사개발을 지지해야 하는 때늦은 군사주의에 흡수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는 점 또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한미FTA, 이념적 선택!
다른 한편 우리가 보기에 한미FTA 추진의 주요 논리 중의 하나인 ‘중국위협론’의 시각은 정확하게 미국의 입장을 한국의 것으로 동일시하고 받아들인 것에 다름 아니다. 중국경제의 성장이 위협이 되는 것은, 바로 그 이웃에서 중국경제에 ‘성공적으로’ 진입하여 그 성장을 자국 경제의 추동력으로 연결시킬 수 있었던 한국이 아니라, 앞서 본 것처럼 세계경제에서 그것을 자신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미국경제의 입장이며, 나아가 그것을 정치·군사적으로 해석하여 자신의 영향력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해야 했던 미국 정부의 입장이지 중국으로 인해 남북관계의 매개적 중간지대를 확보할 수 있었던 한국 정부의 입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중국의 제조업의 추격을 위협으로 느끼며 그것을 이미 포기하려는 ‘패배주의적’ 전략(‘패배주의’는 FTA 반대자들의 것이 아니라 FTA 지지자들의 것이다!)에 대해, 한국 경제의 내부에 침투하여 그것의 성장을 자신의 성장으로 연동시킬 수 있었던 일본의 경우를 들어 반박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좀더 근본적인 문제는 중국의 성장에 대한 전략 이전에 그러한 성장을 적대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입지점이 아닐까? 미국을 통해 경제성장의 다른 동력을 찾으려는 시도조차, 미국과의 동일시가 아니라 미국을 변수의 하나로 고려할 수 있는 시선이 없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음을 다시 지적해야 할까? 다른 한편 서비스업의 선진화로 경쟁력을 확보하자는 화려한 주장에 가려 제조업을 포기한다는 말의 무서운 의미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제조업에 고용되어 있던 사람들, 덧붙여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서비스업으로 선진화된 경제에선 어떻게 될까? 60 넘은 농민들이 은행이나 컨설팅 회사에서 일하는 멋진 미래를 꿈꾸고 있는 것일까? 선진화된 법률사무소나 컨설팅 회사, 보험회사, 은행 등이 이들의 일자리를 충분히 마련해줄 수 있을까? 그런 실업의 증가는 경제의 선진화를 위해선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감수해야 할까? 그렇다면 그런 ‘선진화’, 그런 FTA는 대체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것인가?
이런 점에서 현재 추진되는 한미FTA는 전략적 선택이 아니라 차라리 ‘이념적 선택’으로 보인다. 아메리카니즘이라는 이념. 사실 FTA란 바로 교역조건을 통해 관철시키고자 하는 집단적 이익의 집합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단적 이익에 의해 한미FTA가 방해받아선 안된다”는 노무현의 태도는 그것이 이익 극대화를 위한 전략적 선택이 아니라 이익을 떠난(떠났다고 생각하는) 이념적 선택임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단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남북관계에 대한 ‘사명감’(혹은 ‘한건주의’)과 아메리카니즘이라는 이념, 이것이 ‘운동권 출신’임을 자처하고 ‘참여정부’를 자칭하는 현 정부가 모든 이익집단의 요구에 귀를 막고, 농민을 비롯한 수많은 민중들의 거대한 함성에도 귀를 틀어막고 오직 한 길로 ‘올 인’하는 근본적인 추동력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념적 선택이 실용주의적이고 전략적인 선택을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 한미FTA를 밀어붙이고 있는 고위급 경제·통상관료들의 경우 좀더 심각하고 치명적인 방식으로 드러난다. 현재 한국의 민주주의, 즉 데모크라시(democracy)는 사실상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로 전환되고 있다. 테크노크라트, 즉 기술관료들에 의해 민중(데모스demos)의 추방이 이루어지고 있다. 테크노크라트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예외상태(state of exception)’를 설정함으로써 민중적 통제에서 벗어나 자기들의 구상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들은 ‘늦으면 도태된다’거나 ‘언제까지 협상을 완료해야 한다’는 식으로 요란하게 긴급 상황(예외상태!)임을 주장하면서, 그리고 협상 전 우리 전략을 노출해선 안된다면서 ‘비밀주의’(예외상태!)를 주장함으로써 자기의 지배력을 확대하고 있다. 현재 의회는 완전히 무기력하며(그들은 FTA에 대해 국민보다도 무지하다!), 테크노크라트들을 통제하기는커녕 그들의 행동에 대한 이념적·도덕적 장식물이 되고 있다. 대통령조차 뒤늦게 보고받고 설득되는 관료들의 지배체제가 서서히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모든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고 오직 국민의 이익을 실증적으로만 연구한다는 관료들은 이미 자기 이익을 위해 데이터들을 조작하여 멀쩡한 은행을 헐값에 매각하는 일도 서슴지 않고 있다. 그러나 테크노크라시 사회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너무 늦게’ 밝혀진다. 사태는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엉망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려진다. 한미FTA가 이와 다르리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우리는 달리 어쩔 도리가 없는 상황 속으로 점점 빠져들고 있는 건 아닐까? 기술관료들의 도덕과 애국심을 우리가 여전히 믿어야 할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도덕적이고 애국적일 때조차, 또 그들이 진정으로 자기이익과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고자 노력할 때조차, 그들은 ‘아메리카니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지식이나 학문, 그들이 판단 기준이 모두 미국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들 대부분은 미국에 유학했거나 미국 학문의 세례 속에서 자랐다. 그들은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운 객관적 판단을 내린다고 하지만, 그럴 때조차 그 객관적 판단의 기준은 철저히 미국적인 것이다. 이것이 한미FTA처럼 그토록 준비되지 않은 심각하고 거대한 일을 일년도 안되는 기간 안에 제대로 된 연구보고서 없이도 과감하게 추진하는 이유인 것이다.
또 다시 ‘민족’의 이름으로?
물론 한미FTA가 강력하게 추진되는 이유가 이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 동안 역사에 남을 무언가를 하고자 했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한 게 없는 노무현 정부로서는,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동안 크게 눈에 띄는 가시적인 성과를 얻을 무언가가 필요했다(노무현이 자주 사용하는 ‘올 인’이라는 단어는 이런 태도를 단적으로 표현한다). 아마도 남북관계의 진전은 이를 위한 가장 손쉬운, 그리고 가장 가시적인 효과를 갖는 대답거리를 제공했을 것이 분명하다. 제2차 정상회담의 개최, 혹은 개성공단을 확장하여 거기서 생산된 것을 한국산 제품으로 표시하여 미국에 판매하는 것. 특히 후자는 남한 자본에게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북한을 남한의 경제적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효과를 가질 뿐 아니라, 경제적 궁지에 몰린 북한에 대해서도 상해와 같은 자유경제구역보다 훨씬 통제하기 쉬운 조건으로 경제적 활로를 열어줄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훌륭한 ‘윈-윈 게임’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그토록 거대한 비용을 치러야 함에도 불구하고, 미친 듯이 몰래 숨어서 FTA를 추진하는 ‘경제적’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아마도 ‘민족해방’을 자신의 징표로 삼는 한국의 일부 운동권 세력이 어이없게도 미국에 대한 투쟁이 가장 시급한 이 사안에 대해서 반미투쟁을 선도하기는커녕 ‘조건적 지지’의 입장에 서려는 이유일 것이다. 한미FTA가 북한에 개성공단이라는 숨구멍을 열어준다면 그것을 지지할 수 있다는 입장. 더불어 이를 통해 남북한 긴장을 완화하고 군축을 유도함으로써 과도한 국방비를 줄일 수 있다면, 사회 양극화 해소를 위한 재원을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 민족과 통일이라는 이름으로 반미를 부르짖어오던 이들이 다시 민족과 통일이라는 이름으로 미국과 손을 잡으려는 괴이한 역사적 아이러니를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런 점에서 한미FTA는 민족주의 진영에 일종의 균열을 야기할지도 모른다. 반미라는 민족주의적 성향과 통일운동이라는 민족주의적 성향의 분할이 발생할 가능성을, 이미 사태가 여기에 이른 지금 대체 누가 없다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 경우 한미FTA는 민족주의 진영의 동요와 분열이 시작될 계기로 자리잡을 것이다. 노파심에 말하자면, 이는 한국의 민족주의가 우익의 이념으로 자리잡는 전형적인 근대적 배치로 변환되는 문턱이 될 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과거의 우익들, 정말 지킬 거라곤 자기 눈앞의 이익밖엔 없는 친미·반공주의자들을 대신해서, 말 그대로 민족이란 이름으로 호명하고 사고하는 전형적 우익들이 한국의 정치지형에서 보수파의 자리를 차지하는 이동과 변환이 출현하게 되는 게 아닐까? 반미 없는 민족해방파의 출현은, 말 그대로 ‘친미민족주의’ 내지 최소한 ‘비-반미 민족주의’가 한국의 정치지형에서 실질적인 존재로 가시화되기 시작하는 하나의 징후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제 투쟁의 주체와 투쟁이 요구해야 할 권리에 대한 고민으로 나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 한미FTA는 투쟁의 주체와 관련해서 우리에게 중요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우리 투쟁을 빛바랜 민족해방투쟁의 지평에 가두어선 안된다. 민족이 투쟁의 주체로 호명되는 것은 여러모로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민족주의 세력 중 일부가 보이고 있는 한미FTA에 대한 불안정한 태도는 투쟁의 전선에 대한 잠재적 위협이 될 것이다. 한미FTA에 반대하는 이유가 단지 민족적 자존심이나 민족적 자립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남북정상회담이나 남북경제협상, 6자회담 등의 문제가 가시화될 때 투쟁이 그 침로를 상실하게 되리라는 것은 불문가지다.
더욱이 투쟁 주체로서 민족을 호명하는 것은, ‘도래할 FTA의 재앙’을 ‘이미’ 체험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소수자들의 문제를 은폐하는 효과를 낼 것이다.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온 것처럼 보이는 FTA는, 경제학적 총량지표와 경제적 이득의 계산, 그리고 시장과 경쟁력,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장애인들, 이주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여성들, 청년들, 그리고 갯벌에 사는 생명체 모두에게 이미 오래 전에 찾아왔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그들에 대한 착취를 조장하거나 방조했음을 깨달아야 한다. 한미FTA는 그 재앙의 규모와 강도를 더할 수 없는 최대치로 증폭시킴으로써 남 얘기로 쉽게 치부하던 문제가 결코 남 얘기가 아님을 알려주는 전령인 셈이다. 따라서 FTA에 대한 투쟁은 민족이 아니라 이 모든 소수자들로부터, 이 모든 민중들, 이 모든 대중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한미FTA를 통해 불모화될 우리 자신의 삶, 대중의 삶, 나아가 생명 전체의 문제를 직시하고 그것과 결부하여 투쟁해야 한다. FTA를 통해 발생하게 될 농민층의 대대적 붕괴, 그리고 유전자조작식품이나 환경문제 등으로 인해 위협에 처할 우리의 생명 활동 자체, 그리고 FTA와 더불어 본격화될 노동, 보건 및 의료 문제, 문화적 자생력의 문제 등등, 모든 집단적 이익 전체를 하나로 모으며, FTA라는 허구적 전체 이익에 대해, GDP 같은 총량적 경제지표나 남북관계나 ‘경쟁력’ 같은 이데올로기적 개념으로 선전되는 ‘보편적 이익’에 대항하여, 우리 자신의 삶 하나하나와 결부된 ‘구체적 이익’의 문제를 통해 사유하고 행동해야 한다. 더불어 이러한 생존과 생활의 문제를 생명의 문제로, 우리 자신의 생명력을 확보하고 수호하기 위한 ‘생명권’, ‘삶의 권리’ 문제로 제기해야 하며, 이를 통해 자신이 살고 싶은 곳에서 살려는 평택 농민들의 투쟁, 개발의 미명 아래 죽음으로 밀려가는 새만금 갯벌의 생명체들의 생존을 생명의 권리로서 함께 사유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투쟁의 의지를 확고히 하는 한, 아마도 한미FTA는 그로 인해 예상되는 피해범위의 광범위함으로 인해 지금까지 흩어진 채 산개되어 진행되던 한국의 사회운동을 다시 하나로 집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들 각자의 이익에서 시작하지만 우리 자신의 이익을 넘어서 타인들의 이익을 배려하는 연대의 계기, 우리의 생존을 넘어서 우리와 생명체들의 생존과 생명까지 나의 문제로 고려하고 배려하는 연대의 계기, 그리고 그러한 연대가 혁명적 열정으로 응집될 수 있는 ‘응축’의 계기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3개월만에 집결된 투쟁의 대열은 이러한 예견에 대한 강력한 증거일 것이다.
반면 준비되지 않는 만큼 오직 비공개와 비밀주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저 개방하는 것 말고는 협상의 기술조차 갖지 못한 관료들의 무능력과,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별 관심도 없고 아는 것도 없이 그저 FTA 해야 한다는 ‘이념적’ 당위론만을 떠들고 있을 뿐인 보수파들의 대응은, 내용이 없어서 깨부술 게 별로 없다는 기이한 난점만을 제외한다면, 아주 취약한 것임이 분명하다. 설득할 수 있는 내용이나 자료의 부재로 상징되는 관료들의 무능력은 이미 대중은 물론 보수파나 여당 의원들 눈에까지 가시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중간층의 동요까지 나타나고 있다. 아마도 우리는 오래간만에 가시적인 승리를 쟁취하는 투쟁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